2008 필사 시

고정희 시집...네째거리--진혼마당 10.11.12.13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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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한 이름을 부르면 산천초목이 울고


일천간장 갈가리 찢어지는 이 사연
내장에 고춧가루 확 뿌리는 이 곡절
어느 누가 풀어주며
어느 누가 씻어주리까
마른 낙엽에 불붙은 가을인 양
피가 타고
살이 타고
목이 타는 어머니
죄짐 같은 팔년 세월 아들 딸 제상 앞에
통곡 한 사발 따라 음복합니다
구천에 떠도는 혼백
목놓아 호명합니다
한 이름을 부르면
산천초목이 울고
두 이름을 부르면
천지신명 호곡소리
인륜으로도 천륜으로도 감당할 수 없으니
불쌍하고 애달픈 우리 어머니
혼절한 두 눈에
칼이 되고
화살이 되어 꽂히는 이름
이 이름에 맺힌 사연
저 이름에 맺힌 누명
설설이 풀어내사
맑고 곱게 씻어
원왕생 원왕생 인도하사이다

11. 벼랑 끝에 서 있는 우리 인생

거두소서 거두소서
칼날을 거두소서
벼랑 끝에 서 있는 우리 인생
저 목숨 끊어지면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우리 인생
헛되고 막막한 우리 인생
제 가슴에 박힌 못 뽑아내지 못합니다
제 핏줄 속에 실린 장막 거둬내지 못합니다

이 넋을 받아
칼날을 꺾으소서
묘지번호 96전 박현숙
생멸 나이 열여덟
신의여고 3학년
군부독재 총칼 아래 산화한 넋

이 넋을 받아
칼날을 꺾으소서
묘지번호 83번 손옥례
생멸 나이 열아홉
송원여고 3학년
계엄군 총에 맞아 암매장당한 넋

이 넋을 받아
칼날을 꺾으소서
묘지번호 61번 김춘례
생멸 나이 열아홉
계엄군 칼에 맞아 쓰러진 넋

이 넋을 받아
칼날을 거두소서
묘지번호 45번 이성자
생멸 나이 열여덟
오일팔 현장에서 피로 물든 넋

이 넋을 받아
칼날을 거두소서
묘지번호 6번 박금희
생멸나이 열일곱
춘태여상 3학현
헐혈하고 나오다가 총살당한 넋

이 넋을 받아
칼날을 거두소서
묘지번호 54번 박선영
생멸 나이 갓스물
서울교대 2학년
광주학살 억울하여 분신한 넋

07.12.31./낮 12시 01분


12. 이 넋을 받아 칼날을 거두소서

거두소서 거두소서
칼날을 거두소서
금남로에 흩어진 넋
칼날을 거두소서
충장로에 흩어진 넋
칼날을 거두소서
대인동에 흩어진 넋
칼날을 거두소서
화정동에 흩어진 넋
칼날을 거두소서
양동에 흩어진 넋
칼날을 거두소서
화순 너릿재에 흩어진 넋
칼날을 거두소서
학동시장에 흩어진 넋
칼날을 거두소서
진월리에 흩어진 넋
칼날을 거두소서
상무동에 흩어진 넋
칼날을 거두소서

거두소서 거두소서
칼날을 거두소서
무등산에 흩어진 넋
칼날을 거두소서
강물에 흩어진 넋
칼날을 거두소서
바다에 빠뜨린 넋
칼날을 거두소서
저수지에 수장한 넋
칼날을 거두소서
공사판에 암장한 넋
칼날을 거두소서
깊은 산에 풍장한 넋
칼날을 거두소서
우리 밥숟가락에 묻은 넋
칼날을 거두소서

13. 누가 그날을 모른다 말하리

넋이여,
망월동에 잠든 넋이여
하늘이 푸르러 눈물이 나네
산꽃 들꽃 피어나지 눈물이 나네

누가 그날을 잊었다 말하리
누가 그날을 모른다 말하리
가슴과 가슴에서 되살아나는 넋
칼바람 세월 속에 우뚝 솟은 너

진달래 온 산에 붉게 물들어
그날의 피눈물 산천에 물들어
꽃울음 가슴에 문지르는 어머니
그대 이름 호명하며 눈물이 나네

목숨 자친 역사 뒤에 자유는 남는 것
시대는 사라져도 민주꽃 만발하리
너 떠난 길 위에 통일의 바람 부니
겨레해방 봄소식 눈물이 나네

07,12,31/저녁 6시4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