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16.17.18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1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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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폭풍

자전거포도 순댓국집도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모두 장거리로 쏟아져나와
주먹을 흔들고 발을 굴렀다
젊음이들이 징과 꽹과리를 치고
처녀애들은 그 뒤를 따르며 노래를 했다
솜뭉치에 석윳불이 당겨지고
학교마당에서는 철 아닌 씨름팔이 벌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겨울이 와서
먹구름이 끼더니 진눈깨비가 쳤다
젊은이들이 흩어져 문 뒤에 가 숨고
노인과 여자들만 비실대며 잔기침을 했다
그 겨우내 우리는 두려워서 떨었다
자전거포도 순댓국집도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07.12.29./아침 8시 56분

17
그날

젊은 여자가 혼자서
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
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렬
연기가 깔린 저녁길에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
문과 창이 없는 거리
바람은 나뭇잎을 날리고
사람들은 가로수와
전봇대 뒤에 숨어서 본다
아무도 죽은 이의
이름을 모른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그날

07.12.29./아침 8시 59분

18
山1番地

해가 지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바람이 찾아온다.
집집마다 지붕으로 덮은 루핑을 날리고
문을 바른 신문지를 찢고
불행한 사람들의 얼굴에
돌모래를 끼어얹는다.
해가 지면 산 일번지에는
청솔가지 타는 연기가 깔린다.
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내들은
서로 속이고 목을 조르고 마침내는
칼을 들고 피를 흘르는데
정거장을 향해 비탈길을 굴러가는
가난이 싫어진 아낙네의 치맛자락에
연기가 흐늘댄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
죽어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온
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
애비 없는 애기를 밴 처녀는
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그리하여 산 일번지에 밤이 오면
대밋벌을 거쳐 온 강바람은
뒷산에 와 부딪쳐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