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10.11.12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1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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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어느 8월

빈 교실에서 누군가 오르간을 탔다
빨래바위 봇물에 놓은 어항에는
좀체 볼거지들이 들지 않아
배꼽에도 차지 않는 물에 드나들며
뜨거운 오후를 참외만 깎았다
해가 설핏하면 미장원 계집애들이
고기 잡는 구경을 나와
마침내 한데 어울러 해롱대었으나
싸늘한 초저녁 풀 이슬에도 하얀
부름달에도 우리는 부끄러웠다
샛길로 해서 장터로 들어서면
빈 교실에서는 오르간 소리도 그치고
양조장 옆골목은 두엄냄새로
온통 세상이 썩는 것처럼 지겨웠다

07.12.28/밤 11시 13분

11
잔칫날

아침부터 당숙은 주정을 한다
차일 위에 덮이는 스잔한 나뭇잎.
아낙네들은 뒤울안에 엉겨 수선을 떨고
새색시는 신랑 자랑에 신명이 났다.
잊었느냐고 당숙은 주정을 한다.
네 아버지가 죽던 날을 잊었느냐고.
저 얼빠진 소리에 귀기울여 뭣하랴.
마친내 차일 밑은 잔칫집답게 흥청되어
새색시는 시집 자랑에 신명이 났다
트럭이 와서 바깥마당에 멎었는데도
잊었느냐고, 당숙은 주정을 한다.
네 아버지가 죽던 꼴을 잊었느냐고.

07.12.28/밤 11시20분

12
장마

온 집안에 퀴퀴한 돼지 비린내
사무실패들이 이장집 사랑방에서
중돋을 잡아 날궂이를 벌인 덕에
우리들 한산 인부는 헛간에 죽치고
개평 돼지비계를 새우젓에 찍는다
끗발나던 금광시절 요릿집 애기 끝에
음담패설로 신바람이 나다가도
벌써 예니레째* 비가 쏟아져
담배도 전표도 바닥난 주머니
작업복과 뼛속까지 스미는 곰팡내
술이 얼근히 오르면 가마니짝 위에서
국수내기 나이롱뻥을 치고는
비닐우산으로 머리를 가리고
텅 빈 공사장엘 올라가본다
물 구경 나온 아낙네들은 우릴 피해
녹슨 트랙터 뒤에 가 숨고
그 유월에 아들을 잃은 밥집 할머니가
넋을 잃고 앉아 비를 맞는 장마철
서형은 바람기 있는 여편내 걱정을 하고
박서방은 끝내 못 사준 딸년의
살이 비치는 그 양말 타령을 늘어놓는다

*예니레 - 엿새나 이레

28.12.28/밤 11시 4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