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7.8.9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19.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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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농무農務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쳐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둘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07.12.28./아침 8시 53분

8
꽃, 그늘

소주병과 오징어가 놓인
협동조합 구판장 하루
살구꽃 그늘.

옷섶을 들치는
바람은 아직 차고
'건답직파'* 또는

'농지세 1프로 감세'
신문을 뒤적이는
가난한 우리의 웃음도
꽃처럼 밝아졌으면.

소주잔에 떨어지는
살구꽃잎.
장터로 가는 조합마차.


*건답직파乾畓直播조금만 가물어도 말라버리는 논에 그대로 씨를 그대로 씨를 뿌리는 일. 마른논-곧뿌림

07.12.28/아침 8시 59분


9
눈길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지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
수제빗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 때
아낙은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우리는 미친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

07.12.28/아침 9시 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