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19.20.21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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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눈오는 밤에
나를 찾아온다.
창 밖에서 문을 때린다.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한다.

꿈속에서
다시 그를 본다.
맨발로 눈 위에 서 있는
그를.
그 발에서
피가 흐른다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내게 다가와서 손을
잡는다.
입 속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

잠이 깨면
새벽종이 운다.
그 종소리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일어나
창을 열어 본다.

창 밖에 쌓인
눈을 본다.
눈 위에 얼룩진 그의
핏자국을. 그
성난 눈초리를.

07.12.28/밤 1시 20분
20
3월 1일

골목마다 똥오줌이 질퍽이고
헌 판장이 너풀거리는 집집에
누더기가 걸려 깃발처럼 퍼덕일 때
조국은 우리를 증오했다 이 산읍에
삼월 초하루가 찾아올 때.

실업한 젊은이들이 골목을 메우고
복덕방에서 이발소에서 소숫집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음모가 펼쳐질 때
조국은 우리를 버렸다 이 산읍에
또다시 삼월 일일이 올 때.

이 흙바람 속에 꽃이 피리라고
우리는 믿지 않는다 이 흙바람을
타고 봄이 오리라고 우리는
믿지 않는다 아아 이 흙바람 속의
조국의 소식을 우리는 믿지 않는다.

계집은 모두 갈보가 되어 나가고
사내는 미쳐 대낮에 칼질을 해서
온 고을이 피로 더럽혀질 때
조국은 영원히 떠났다 이 산읍에
삼월 초하루도 가고 없을 때.

07.12.29/밤 1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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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울로 가는 길

허물어진 외양간에
그의 탄식이 스며있다
힘없는 뉘우침이

부서진 장독대에
그의 아내의 눈물이
고여 있다 가난과
저주의 넋두리가

부러진 고욤나무 썩어
문드러진 마루에
그의 아이들이
목소리가 배어 있다
절망과 분노보다 맹세가

꽃바람이 불면 늙은
수유나무가 운다
우리의 피가 얼룩진
서울로 가는 길을
굽어보며

08.12.29/ 밤 1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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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들떴던 마음을 가라 앉히고
다시 차분히 시를 좀 봐야겠어요.

현재 젊은 사람들의 시와 너무 달라 이런 시를 보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지만
고전이나 명편들의 시를 보지 않고는
새로운 시를 만날 수도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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