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산벚나무를 읽는 저녁
최재영
물에 젖기 위해
100년을 걸어가는 나무가 있지요
퉁퉁 부르튼 맨발 사이로
세상의 저녁은 소리없이 스며들고
다가오는 천년을 가만 응시하느라
나는 바짝 가물어 있었지요
간절함은 어디에도 기록할 수 없어
한 획씩 혈관을 파고 들어갈 때마다
산벚의 흰 그늘까지 움찔거렸겠지요
한걸음 걸을 때마다
제 근원의 몸부림으로 뜨거웠을 시간들
그때의 다급한 호흡은
어떤 이의 애닮은 기록이었을까요
산벚이 거느린 골짜기들이
일제히 먹빛의 힘으로 일어서는 저녁
경판에 서려있는 푸른 맥박소리
온 산 가득 울려 퍼지는데
먹물보다 진한 핏빛눈물 하얗게 쏟아지네요
오래 전 생의 바깥에 등불을 밝힌 이들은
지금도 구국의 화엄을 새기고 있을까요
봄이면 경판 속의 활자들 환하게 피고지고
짜디짠 소금기 허옇게 일어서는지
골짜기마다 산벚나무는 절뚝이며 피어나요
팔만의 꽃잎들이 봄의 한복판을 걷고 있어요
*산벚나무: 고려시대 몽골 침입 당시 팔만대장경의 경판으로 쓰였으며 벌채한 나무를 판자로 자른 후 소금물에 삶아서 그늘에 말린 후 옻칠을 하는 과정을 거친다.
2021 1월 21일 15시 43분목요일
갈매기식당
파도가 철썩이며 제일 먼저
눈도장을 찍었나 봐요
금이 간 유리창에
파도의 지문이 선명하거든요
이때쯤이면 끼룩거리는 갈매기는
식당으로 노을을 퍼 나르느라 분주하고
정신없이 우왕좌왕하던 파도도
조금은 점잖아진 것 같군요
자꾸만 복받치는 감정을 정리중인게지요
문틈이 틀어진 식당 문은 삐걱인지 오래
힘겹게 들어온 손님들은
죄다 비릿한 사연을 풍기고 있죠
모두 바다와 한통속이라는 뜻일까요
누군가 접시 위의 노을을 한 점 집어
매콤새콤 초장을 찍는군요
순간 입으로 확 퍼져가는 파문들
간밤에 슬그머니 야반도주한
한 쌍의 괭이갈매기 얘기로 떠들썩해요
소문은 삽시간에 돌기 마련인지
굽이굽이 망망대해가 펼쳐지고
멀리 느슨한 수평선이
갈매기식당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네요
산전수전 다 겪은 문짝만이
쉴 새 없이 덜컹거려요
2021 1월 21일 15시 51분목요일
버드나무 여인숙
강가에 버드나무 한 그루 늘어져 있네
제법 터주대감 흉내를 내느라
오가는 모든 계절을 불러들이는데,
요염한 달빛이 창백한 낯빚을 들이대네
숙박부를 기재하며 힐끔, 곁눈질에
속내까지 죄다 들키고 말아
버드나무는 찍어올린 수심의 깊이를
구구절절 읊어대네
강변 한 켠 얻어사는 행색으로야
그리 푸르를 일도 아니건만
수시로 낭창거리며 흐느적거리네
몸을 뒤섞은 바람은 시치미 뚝 떼고
벌서 저만치 줄행랑인데
사연없는 투숙객은 없다고
간혹 풀피리를 불어대는 통에
소문은 삽시간에 일파만파 퍼저 가네
저녁놀을이 잔물결로 서성이는 강변에
흐릿한 등불 하나 내걸었는지
허름하고 낡은 문짝 삐걱이는 소리 요란하네
만삭의 달빛이 버드나무를 기웃거리네
2021 1월 21일 15시 57분 / 목요일
코스모스*
속없이 흔들리기만 하는 게
어디 제 본심이겠어요
흙먼지 뒤집어쓰고 앉아
손 흔드는 게 할 일이라고 하지만
오는 이 가는 이
마음 살피는 게 쉽기만 하려구요
오래 전 아득한 혼돈 속에서
우렁찬 굉음과 함께 우주가 열릴 때
심장이 까맣게 타들어간 기억으로
매순간 철렁이며 피어나는 걸요
태초 제일 먼저 눈을 뜨자마자
하늘을 밀어 올리느라
야윌 때로 야윈 걸 어쩌겠어요
덕분에 솜털 보송한 말간 입술 내밀며
흔들리면서 가을 길을 내고 있지요
어떤 연애는 나와 함께 피어나
수시로 흔들리기를 반복했다죠
뭐든지 흔들린다는 것은 중심을 잃었다는 것
미덥지 못하잖아요
바람은 떠나보낸 것들을
다시 되돌려 놓은 법이 없거든요
때문에 어디서나 무리지어서
떼창*을 하는 건지도 몰라요
*코스모스: 신이 가장 먼저 만들 꽃이라 함
*떼창: 합창의 우리 말
2021년 1월 21일 17시 07분 / 목요일
주머니
문득 물컹한 물체가 잡힌다
언제부터 따라 왔을까
어두운 주머니 속을 밝혔을 꽃잎 몇 장
꺼내보니 합장하듯 포개져 있다
지난 며칠 내 행적을 고스란히 엿보았을 터
주머니 속에 들어앉아 시간을 저울질 했는지
해가 가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러고보면
안과 밖의 은밀한 내통으로 세상은 돌아간다
돌고돌아 지구는 끝이 없고
꽃잎의 혈맥은 단호하여
시간의 중심을 뚫고 낙화하는 잎새에서
하루해가 기울고 한 세계가 만발한다
한낱 꽃이 피는 일도 지는 품새도
사람의 한 생과 같다는 걸
주머니는 미리 알고 어두워졌을까
뻔한 주머니 사정을 알고 돌아가는 저물녘
하루 해를 끌고 가는 꽃잎 몇 장 휘날린다
축축하게 젖어 늘어진 볼품 없는 주머니들
<2020 제19회 김포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2021년 1월 21일 17시 17분 / 목요일
최재영 –강원일보 한라일보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방송대문학상 대상 정읍사문학상 대상. 산림문화대전 대상 성호문학상 본상. 웅진문학상 우수상 김포문학상 대상. 시집 [루파라렐라] 한국문학예술위 창작지원금.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자] .세종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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