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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 다녀 올 때마다
이은심
사랑이 온 적 없어 거절하지 못했네
이별이 온 적 없어 헤어지지 못했네
동동 구르는 발목을 꼭 쥐고 살자고, 살아보자고, 난간은 말리고 싶었지
붉은 고무통이 내 스무 살처럼 엎어져 있고 구석구석 방수처리를 해도 눈물은 새어 나와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내려가자 했지
파란 초원 앞에 서 있는 기분으로 살 수는 없을까 미안을 널어 말리고 벗겨지는 페인트가 본색을 드러낼 때 나는 독학으로 슬픔을 익혔지
어두운 옷가지를 떨어뜨리는 빨랫줄이 온전한 옷 한 벌 없는 것처럼 나는 왜 거기 있는지 모르는 제라늄화분
동서남북은 왼쪽 뺨을 마구 때리다가 오른쪽 구석에 가서 울기도 했다네
나는 누구를 웃기려고 울면서 세상에 온 것일까
누구를 울리려고 웃기기만 하는 여기에 온 것일까
끔찍하게 사랑하고 끔찍하게 버림받고
내려갈 길을 잃은 옥상은 지금 우는 사람 몰래 혼자 있네
―시집『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상상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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