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자주색 가방​ /김지명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7. 21. 09:12
728x90

자주색 가방

 

​김지명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아

길을 잃어버릴 수 없는데

난민의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애초에 직각을 사랑했습니다

밟지도 밟히지도 않으려

헤르메스 지팡이를 매달았습니다

 

싸움 없는 싸움 놀이 없는 놀이 속에서

끓는 점 없는 억양으로

서류나 도시락, 필기구는 나란했습니다

 

서류 대신 뒷담화 표정을 집어넣고

도시락 대신 참회 없는 지갑을 집어넣고

궁금해 환장해 할 지퍼를 달았습니다

 

나를 포장한 세계는 유효기간이 적지 않아

사인하는 손들이 얼굴을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골목이 등장한 건지

얼마나 많은 손이 등장한 건지

 

등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배불리 모퉁이를 돌았습니다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아

직각을 넘어서면 바닥입니다

 

뜻밖의 나무 한 그루 신목처럼 자라도록

지팡이 꽂아두었지만

나는 왕으로 태어난 비참이었습니다

 

내가 사는 마을의 둘레만큼 죄책감이 무성해지면

옆구리 터진 인물들

육신인지 시신인지

도무지 유배된 얼굴입니다

 

 

 

―시집 『다들 컹컹 웃음을 짖었다』(파란, 2021)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름 /윤은영  (0) 2021.07.21
당신이 지나간 자리 /김지명  (0) 2021.07.21
옥상에 다녀 올 때마다 /이은심  (0) 2021.07.20
빨간다리* 건너기 /홍계숙  (0) 2021.07.20
옥탑방 /구봄의  (0) 2021.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