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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색 가방
김지명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아
길을 잃어버릴 수 없는데
난민의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애초에 직각을 사랑했습니다
밟지도 밟히지도 않으려
헤르메스 지팡이를 매달았습니다
싸움 없는 싸움 놀이 없는 놀이 속에서
끓는 점 없는 억양으로
서류나 도시락, 필기구는 나란했습니다
서류 대신 뒷담화 표정을 집어넣고
도시락 대신 참회 없는 지갑을 집어넣고
궁금해 환장해 할 지퍼를 달았습니다
나를 포장한 세계는 유효기간이 적지 않아
사인하는 손들이 얼굴을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골목이 등장한 건지
얼마나 많은 손이 등장한 건지
등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배불리 모퉁이를 돌았습니다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아
직각을 넘어서면 바닥입니다
뜻밖의 나무 한 그루 신목처럼 자라도록
지팡이 꽂아두었지만
나는 왕으로 태어난 비참이었습니다
내가 사는 마을의 둘레만큼 죄책감이 무성해지면
옆구리 터진 인물들
육신인지 시신인지
도무지 유배된 얼굴입니다
―시집 『다들 컹컹 웃음을 짖었다』(파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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