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 / 슬픈 가족사 - 서상영의 '감자꽃-영월 동강가에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9. 23.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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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 / 슬픈 가족사 - 서상영의 '감자꽃-영월 동강가에서'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 / 슬픈 가족사 - 서상영의 '감자꽃-영월 동강가에서'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 / 슬픈 가족사 - 서상영의 '감자꽃-영월 동강가에서'

 

감자꽃
  ―영월 동강가에서

서상영

 

어린애도 채간다는 부엉이 소리
멧새 모두 숨죽이는 밤
할아비는 평생 쌀 한 말 못 먹고 죽었다고
뗏목꾼인 아빈 곰 같은 어깰 들척이며
술주정으로 잠들었다

쿨쿨 코고는 소리는 도적처럼 울리고
감자 싫어 내뺐다는 어매는
원래 동강 뗏목꾼들이 우러렀다는 들병장수

방문 열고 사립문 밖 뛰쳐나오면
웬 놈에 감자꽃은 저리도 하얗나
굽어봐도 산 첩첩 산 넘으면 물 첩첩
아비는 잠에서도 드센 물결 소리 듣는가
꿈을 설치고 부엉이 울음 울고
아아 재째거리는 풀벌레처럼 난 사는구나

해지는 남쪽 길을 오도카니 쳐다보면
눈엔 누구처럼 화냥기가 백혔구나
이년아 저 강물 건너면 못 돌아온다
칡뿌리가 늙어 구렝이 될 때까지 감자꽃처럼 살그라
아비는 내 맘을 후려치며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소낙비 내리면 기운이 더 난다며
떼돈 벌러 뜀박질쳐 간 아비
된꼬까리서 돌아왔더라
평생 못 타본 가마 타고 사뿐사뿐 돌아왔더라
산맥 같은 어깬
소금토리가 물에 빠진 듯 싱겁게 풀어지고
감자꽃 진 자리 열매가 없다

갈라진 흙바람 벽에 부엉이 소리 스미고
강 안개 걷혀 해 들면 머릴 감았다
타향이 없으니 고향도 없고
감자꽃은 피고 지고
울음보다 외롬이 더 싫은 날엔

감자를 캔다
뭐라 내보이기도 수줍은 한 생을 캔다
꽃 진 자리 쭈그렁 열매도 없던 아비가
땅 아래서 살뜰히도 영글었다
하늘을 뿌리 삼아 가지 벌려 열렸다

-『문학나무』(2002. 가을)

 

<해설>

오늘은 입하(立夏)다. 벌써부터 이렇게 더우니 이번 여름을 어떻게 날까 걱정이 된다. 오늘따라 안치환의 노래 <내가 만일>의 “더운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나 그대 위해 시원하게 내리고 싶어”라는 가사가 생각난다. 올 여름의 더위를 미리 걱정하는 대신 시원한 시를 읽는 것이 좋겠다.

시인은 첩첩산중을 휘돌아 흐르는 동강 일대의 풍광 이야기와 함께 어느 가난한 가족의 가족사를 들려준다. 시인의 나이로 보아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강원도 영월 동강에서 뗏목꾼으로 살아간 아버지와 들병장수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난 딸이 이 시의 화자다. 화자는 아버지의 파란 많았던 생을 한 편의 시에 담는다. “소낙비 내리면 기운이 더 난다며/떼돈 벌러 뜀박질쳐 간 아비”는 “칡뿌리가 늙어 구렝이 될 때까지/감자꽃처럼 살그라”라고 내게 말했지만 지금(화자가 이 시를 쓴 시점) 이 세상에 없다. 아비는 땅에 묻혀 감자꽃으로 피어난다. 그 옛날 강원도에는, 그렇다, 감자밖에 먹을 것이 없었다. 강원도가 싫어도 강원도를 떠날 수 없는 이들. 전형적인 ‘이야기 시’로서 섬세한 묘사와 치밀한 구성이 이 시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들병장수는 김유정의 소설에 여러 번 나온다. 여기서는 동강의 뗏목꾼들을 상대로 술을 팔던 여자들을 가리킨다. 뗏목 위까지 술상을 날아오고 춤을 추었다. 된꼬까리는 영월의 거운리에 있는 여울목 이름이다. 평창의 황새여울과 더불어 수많은 뗏목꾼을 하늘나라로 데려갔다.

출처 : 뉴스페이퍼(http://www.news-pape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