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배와 윤동주, 한글과 시조
지난 10월19일 세종대왕기념관에서는 제43회 외솔상 시상식이 열렸고, 22일에는 울산 중구청에서 제5회 외솔시조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한글학자이자 시조시인인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을 기념하여 시행되고 있는 이 행사들은 선생이 10월19일에 탄생하였고 또 10월에 한글날이 있어서 줄곧 그 어름에 열려왔다. 선생은 울산에서 태어나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문과를 마치고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졸업하였다. 주시경 선생 이후 문법 연구를 새롭게 발전시킨 빼어난 공적을 이루었는데, 이 점은 선생의 생애를 두고두고 빛나게 하는 고갱이가 되어줄 것이다. '우리말본', '한글갈', '조선 민족 갱생의 도',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으로 이어지는 한글 혹은 우리말 연구의 성과가 그 찬연한 세목을 이루고 있다 할 것이다.
외솔, 백여수 작품 남긴 '시조 시인'
외솔에 얽힌 삽화 가운데 한순간을 떠올려본다. 외솔은 1926년 4월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1938년 9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파면될 때까지 재직하였다. 1938년 연희전문에 입학한 신입생 윤동주는 선생의 수업을 첫 학기에 수강했다. 한 한글학자와 한 청년시인의 짧은 조우였지만 이들은 모두 제국의 심장을 온몸으로 돌파해간 공통점으로 우리 뇌리에 남았다. 우연이 필연이 되어 한국 근대사의 가슴 벅찬 만남으로 기록될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 인연은 후대에까지 이른다. 윤동주는 후배 정병욱에게 열아홉 편이 담긴 유고를 건네고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오카형무소에서 타계했다. 친필 유고를 간직했던 정병욱은 해방이 되자 그것을 윤동주의 동기 강처중에게 건넸다. 강처중은 당대 최고 시인 정지용에게 시집의 서문을 부탁하였고 자신은 발문을 준비했다. 당시 정지용은 경향신문의 주간, 강처중은 기자였다. 강처중은 윤동주의 또 다른 동기 유영에게 조시(弔詩)를 부탁해놓고 자신이 이런저런 맥락으로 수습해두었던 윤동주의 시 열두 편까지 보태 서른 한 편이 실린 유고시집을 내려고 마음먹었다. 출판사는 정음사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초기, 한글학자로서의 정체성 바탕
애국적 정열·전통에 대한 애정 담아
정음사(正音社)는 1928년 외솔 선생이 창설하여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외솔의 '우리말본'을 비롯하여 한글 관련 서적들을 꾸준히 출간해왔다. 해방 후의 정음사에는 외솔의 아들 최영해(1914∼1981)가 사장으로 있었다. 그 역시 연희전문 문과를 나와 조선일보 출판부에 들어가 '소년'을 편집하였고 경향신문 부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렇게 정지용과 최영해와 강처중은 모두 경향신문과 인연이 있었고, 외솔과 윤동주와 강처중과 유영과 정병욱과 최영해는 모두 연희전문으로 이어졌다. 강처중이 이러한 관련성을 이어 붙여 윤동주 유고시집을 정음사에서 펴낸 것이다.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은 그렇게 정음사에서 1948년 1월30일에 출간되었다. 윤동주 사후 3년 남짓한 세월이 흐른 시점이었다.
중기시조, 옥중시편들로 제약 불구
강렬한 저항 목소리… 대표성 지녀
또 하나 우리가 눈여겨볼 점은 외솔이 백여 수 분량의 시조 작품을 남긴 시조시인이라는 점이다. 최근에는 그의 시조에 대한 학문적, 비평적 고찰작업도 퍽 역동적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이번 울산에서의 시상식 직전에 전국 규모의 세미나가 열린 것도 이러한 과정의 한 반영일 것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시조시인 최현배'라는 면모도 앞으로 적극 부가해 가야 할 것이다. 그의 초기 시조는 애국적 정열과 전통에 대한 애정을 담은 세계로 펼쳐졌다. 한글학자로서의 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민족적 열정과 원형을 사유하는 방식이 그 안에서 출렁인다. 중기 시조는 이른바 옥중 시편들인데, 옥중이라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저항의 목소리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외솔 시조의 대표성을 띠고 있다. 이는 함흥형무소에서 1943년 8월13일부터 1945년 8월17일까지 쓴 작품을 '한글'100호에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후기 시조는 나라와 고향과 한글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차분한 목소리를 담고 있는데, 그 안에는 선생 스스로의 존재론적 기원에 대한 탐색의 열망이 가라앉아 있다. 한글날을 지내면서 떠올려본 최현배와 윤동주, 한글과 시조에 관련된 귀한 장면들이 아닌가 한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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