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시조의 양식적 구심을 지켜내는기율로서의 정형성 /유성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0. 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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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의 양식적 구심을 지켜내는

기율로서의 정형성

 

 

유 성 호-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1. 차세대 주역들의 의욕적 성과

시조 전문지 계간 《시조21》이 창간 20주년을 맞았다. 우리 정형시의 미학적 정립과 창신創新과 국제적 확산을 위해 그동안 《시조21》이 기울인 공력이 돌올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파장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첨예하게 작동하고 있다. 《시조21》은 창간 20주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50인 50색’이라는 코너를 준비했는데, 이 글은 여기 발표된 신작들을 통해 우리 시조미학의 현재성을 살펴보려는 작은 기획이다. 《시조21》 창간 이후에 등단하여 《시조21》에 작품을 발표한 시인들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목록은 비교적 젊고 의욕적인 차세대 주역들의 성과를 조감鳥瞰해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들 작품이 지닌 특성을 중심으로 하여 최근 우리 시조가 걷고 있는 방향에 대한 부분적 진단도 이루어지리라 기대해본다. 가령 우리는 최근 우리 시조가 활발한 장르 변이 차원에서 정형성을 훼손하거나 내용적으로 의뭉한 난해성을 도입해가는 측면을 목도하곤 하는데 이러한 폐단을 이번 신작들이 어떻게 넘어서고 있는지를 찬찬히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 분 한 분마다 대표작과 신작을 실었지만 여기서는 불가피하게 몇몇 시인의 신작을 중심으로 논의해보고자 한다.

 

2. 착실하게 존중된 정형성의 기율

최근 시조시단에 문제적으로 대두하고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언뜻 자유시와 외양이나 속성에서 크게 구별되지 않는 작품들이 씌어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이는 현대시조의 다양한 분화 과정을 보여주는 필연적 현상일지도 모른다. 일정한 형식을 오래도록 견지해온 피로도가 있고, 예술이라는 것이 장르적 확장과 변형을 통해 자기 진화를 이루어가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왜 시조인가?”라는 실존적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많은 시조시인들이 형식 제약이라는 굴레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시조를 택하는가 하는 존재론적 의문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첨단의 디지털 시대에 이처럼 시조의 존재론을 거듭 묻는 것은 시조에는 시조 아니면 안 되는 어떤 고유한 내질이 존재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이번에 발표된 작품들이 정형성의 기율을 착실하게 존중해감을 발견하게 된다. 《시조21》이 어떤 해석안眼으로 시조시단을 충격해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살피는 일은 비평적으로 보아도 긴요한 몫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어제의 그 길 따라 꽃은 계속 피는데

새끼 먹이 꽉 물고서 집으로 갈 뿐인데

한 순간 찢어진 날개, 가해자는 없단다

 

유유히 건너왔던 칼바람 긴 얼음골,

역류의 급물살에도 깃 다치지 않았었지

책임 질 자국도 없이 반짝이는 투명벽

 

살금살금 몰려들어 포식하는 들짐승과

함께 날고 싶은 꽃잎들의 위로 앞에

끊어져 모로 누운 길, 경적 소리 태연하다

― 정경화, 「새의 길은 23번 국도에서 끊긴다」

 

복자기나무 층층나무 개나리 덜꿩나무

나뭇가지 쏘아 날려 봄햇살을 후린다

어둑한 시간의 뒤켠

묵은 잠이 스러지면

 

관절의 마디 깊이 그을렸던 고요의 날

저물었던 숨들의 가락진 목덜미엔

꽃그늘 한 뼘쯤 늘려

바람벽도 세워야지

 

팽팽한 실핏줄이 들뭇들뭇 달아오른

버들개지 방천길을 냅다 달리는 사람들

푸드득 날갯짓하며

꽃봉오리 열어야지

― 박지현, 「춘분」

 

정경화 시조는 서정성과 인식론의 균형 있는 결속이 안정감을 준다. 꽃은 “어제의 그 길”을 따라 오늘도 피어나는데 새끼 먹이 물고서 집으로 날아가던 새는 한순간 날개가 찢어지면서 길을 잃는다. 오랫동안 칼바람 긴 얼음골까지 깃 다치지 않고 날아왔던 새의 길이 그만 “반짝이는 투명벽” 앞에서 끊긴 것이다. 보이지 않는 벽에서 끊긴 새의 길은 “살금살금 몰려들어 포식하는 들짐승”과 “날고 싶은 꽃잎들”과 함께 기이한 삶과 죽음의 현장을 만들어낸다. “끊어져 모로 누운 길” 주위로 태연하게 울어대는 경적 소리야말로 방음벽으로 새의 길을 끊어놓은 인간의 우매한 폭력을 은은하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한 양상을 우화적으로 짚어내면서 그것을 생태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정경화의 서정과 인식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박지현 시조는 봄날 한복판에 어둑한 시간의 뒤켠에서 피어나는 꽃과 나무와 사람들을 관찰하고 표현한 결실이다. 그 세목은 “복자기나무 층층나무 개나리 덜꿩나무” 같은 꽃과 나무의 군집이거나 “버들개지 방천길을 냅다 달리는 사람들” 같은 이들이다. 시인은 봄햇살을 후리는 자연 앞에서 묵은 잠이 스러지고 저물었던 숨들이 걷히면서 팽팽한 실핏줄이 달아오르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그렇게 날갯짓하며 꽃봉오리를 열려는 의지는 자연의 것이기도 하겠지만, 춘분을 맞아 봄날의 활력을 스스로의 삶에 부여하려는 시인 자신의 정서적 몫이기도 할 것이다. 자수의 부분적 탄력을 통해 정형성의 묵수와 창신을 동시에 구현한 작품이다. 두 편 모두 생명의 옹호가 지극히 아름다운데, 특별히 시의성을 도입하면서 정형성을 완미하게 성취한 것이 시선에 환하게 들어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콧노래가 넘나드는 숙자네 바자울이

앙바틈한 오르막에 어깨를 내어주던

어스름 마실 가는 길은

언제라도 좋았다

 

은현면 고갯길이 까마득해 보여도

엄마 손만 잡으면 단숨에 넘어섰지

외삼촌 두툼한 손이

기다리던 삼거리

 

가쁘게 넘어서고 뒹굴었던 진흙탕엔

기꺼이 몸을 내준 길의 품이 새롭다

막히면 새 길을 열던

해달별길 한나절

― 정용국, 「길의 위안慰安」

 

명절에 제사에 녹록찮은 지난 세월

시간 위를 걸어온 종가의 맏며느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일상의 의무처럼

 

병일까 구세주일까 세상 뒤흔든 코로나

명절도 안 된다고 가족도 안 된다고

덕분에 고단한 시간 한 번에 날아갔네

― 김선희, 「날아간 걱정」

 

거품 나는 풋 맛이 단맛이 되기까지

내 안에 나를 찾아 쉬지 않고 걸어온 길

뼈 깎는 인고의 시간 차곡차곡 쌓였지

 

살갗이 탈 것 같은 땡볕을 견뎌내며

몰아치는 천둥 번개도 가슴에 묻은 나날

때로는 견딜 수 없어 불면의 밤 보냈지

 

풋 맛을 익히려고 부단히 걸어온 길

무서리 내리는 밤 우연히 알게 되었지

내 몸에 단내 나는 걸, 참 진정한 내 모습

― 이솔희, 「한 알 대추의 독백」

 

정용국 시조는 길 위에서 삶의 위안을 찾아가는 서사적 온축 과정을 담았다. 가령 어스름 마실 가는 길은 “콧노래가 넘나드는 숙자네 바자울”이 어깨를 내어주었기 때문에 삶의 빛나는 순간을 담고 있었고, 양주 은현면 고갯길은 외삼촌의 두툼한 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엄마 손만 잡고도 단숨에 넘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애의 곡절마다 스스로 가쁘게 넘어서고 뒹굴었던 진흙탕처럼, “기꺼이 몸을 내준 길”들은 삶이 막힐 때마다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던 “해달별길 한나절”을 온전히 담고 있었던 셈이다. ‘길’이라는 유동流動의 상징을 통해 끝없이 위안을 받아온 세월을 넉넉하게 함축하고 있는 작품이다. 흐름에 막힘이 없다. 김선희 시조는 종가 맏며느리가 걸어온 세월을 톺아보는 시편이다. 명절에 제사에 녹록찮은 시간들이 어쩌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일상의 의무처럼” 다가옴을 느끼고 있는 시인은 병인 듯 구세주인 듯 찾아온 감염병이 “고단한 시간”을 한 번에 날려 보냈다고 쓴다. 내면에 쌓였던 걱정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날아간 걱정’은, 물론 반어적 의미를 부분적으로 담고 있지만, 역으로 그동안 변하지 않는 의무처럼 강제되어온 며느리로서의 일상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던지는 위안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소품이지만 단단한 진정성을 풀어낸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솔희 시조는 오랜 시간의 흐름을 형상적으로 담고 있다. 물론 그러한 불면과 인고의 시간을 독백으로 토로하는 화자는 ‘한 알 대추’다. 이러한 의인화의 결과로 화자는 풋 맛이 단맛이 되기까지 그리고 “내 안의 나”를 찾아온 오랜 길을 시간의 등가물로 토로한다. 뼈를 깎는 견딤의 시간은 “몰아치는 천둥 번개도 가슴에 묻은 나날”을 품고 부단히 걸어온 길로 이어져갔다. 결국 화자는 무서리 내리던 밤에 단내 나는 순간을 통해 “참 진정한 내 모습”을 찾게 된다. 그렇게 이 작품은 일종의 성장 서사를 품으며 인고의 시간이 자신을 성숙시켜가게 된 인생론적 진실을 설파하고 있다.

두루 알다시피 시조는 우리 시대에도 연면한 생명력과 영향력과 파생력을 가지면서 그 저변을 확대해가고 있는 현재 진행의 장르다. 견고한 생명력과 폭 넓은 자기 갱신 가능성을 가진 채 우리가 보유한 가장 독자적인 시 양식으로 면면하게 발전해가고 있다. 이는 시조 양식이 우리 민족의 성정性情이나 사유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특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시조를 지나 현대시조로 존재를 옮겨오면서 시조 양식의 본래적 특성들은 많은 변화를 치렀는데, 그것은 현대시조는 현대인의 복합적인 정서와 인식을 담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정용국과 김선희와 이솔희의 시조는 그러한 현대인의 일상을 잘 담아낸 결실로서, 그 안에는 그들이 오래도록 기다리고 축적해온 시간의 ‘길’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3. 내용적 다양성과 고전적 혜안

최근 우리 시조는 활발한 외관을 띠면서 민족 시형으로서의 위상과 미학을 한층 수준 높게 구축해가고 있다. 시조 시단의 인적 구성이나 매체적 조건도 활력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고, 자연스럽게 이러한 흐름은 시조로 하여금 현대성을 개척해가는 양식으로 거듭나게끔 해주었다. 물론 그러한 흐름 가운데서도 시조는 정형의 한계와 가능성을 감안하면서 특유의 균형과 절제의 정형성을 지속적으로 구현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시조 양식의 율격적 구속을 최대한 허물면서 미학적 확장을 꾀하려는 작품들도 적지 않게 씌어지고 있는데, 이번 《시조21》에 발표된 시편들은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면서 정형성을 의식하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확장과 응축이라는 조심스러운 변형들은 있지만 정형성 자체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실험적 의도는 보이지 않아 적잖이 안도감을 준다. 그만큼 우리 시조는 정형의 강화와 이완, 그리고 전통적 정서의 재확인과 현대적 감각의 도입 사이에서 심하게 길항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을 갖자마자 어제를 다 버렸다

저녁이 오기도 전 그마저 또 버렸다

내일을 몹시 탐하는 여전한 중독이다

 

누구나 그럴 거야 너스레를 떨다가도

아무도 없을 거야 나무라며 살아가지

어렵다 하고많은 날 하루를 거두는 일

― 이숙경, 「수국이 세 번 피고 세 번 지는 동안」

 

한 방울 젖을 찾듯 옛 주조장을 찾아간다

 

봄바람 불어와 누룩 섞인 꽃들 피고

 

술 없는, 외로운 봄날은 어둑어둑 소금 피고

 

 

만다라 뿌리 숨은 빈 들길 가는 동안

 

쏟아질 듯 기우뚱 탄식도 엎지르며

 

웃음의 모종을 사러간다 물이 불로 번지도록

 

 

물 빠진 저수지 같은 김빠진 인생이

 

구릉마다 산수유 꽃 취기 일어 피어오르고

 

낮달은 양은 술잔처럼 찌그러져 찾아온다

― 선안영, 「좋은 날」

 

이숙경 시조는 시간예술로서의 본령을 지키면서 그 시간이 결국 어떤 존재 생성의 계기를 품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수국이 세 번 피고 세 번 지는 동안이니 짧은 시간은 아니다. 시인은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자명한 선형적 시간 속에서 “여전한 중독”으로 어제를 버리고 저녁을 버리고 내일을 탐해간다. 누구나 그럴 것이라지만 “하고많은 날 하루를 거두는 일”을 거두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라는 자각 아래 시인은 일상의 시간 속에서 속절없이 흘러가는 하고많은 날들을 두고 ‘수국’의 개화와 낙화를 세 번이나 배치한다. ‘누구/아무’도 그러한 흐름에서 예외가 아님을 단단한 정격 안에서 에둘러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선안영 시조는 옛 주조장을 찾아가는 상황 속에서 시작된다. 한 방울 젖을 찾듯 가는 마음이 “누룩 섞인 꽃들”과 “어둑어둑 소금 피고” 마는 봄날의 한복판을 보여준다. 그렇게 빈 들길을 가는 동안 시인은 탄식을 버리고 “웃음의 모종”을 사러 간다고 고백한다. 물이 불로 번지는 시간은 작품 제목인 ‘좋은 날’을 감각적으로 환기하면서 비록 “물 빠진 저수지 같은 김빠진 인생”일지라도 “산수유 꽃 취기”처럼 좋은 날로 번져가는 ‘주조장-누룩-술-취기-술잔’의 연쇄가 봄날의 도취와 피안을 순간적으로 느끼게 해주고 있다. 비교적 변격이 자유로운 시조로 좋은 날의 감각적 흔들림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이숙경 시조가 구심적이라면 선안영 시조는 원심적이다. 그러한 율격의 한계와 가능성이 우리 시조시단의 허리를 구성하고 있는 두 여성시인의 작품에서 저마다의 가능성으로 숨쉬고 있는 셈이다.

 

성업 중이던 느티가 폐업을 선언한 뒤

 

외곽으로 떠돌던 낯 두꺼운 먼지들만

 

물 만난 상춘객처럼 왁자하게 붐빈다

 

저 그늘을 누가 깨끗하게 닦을 것인가

 

마을 속 신록이며 늙음의 구중궁궐이던

 

밭에서 돌아오던 엄니가 섬처럼 주저앉던

― 손영희, 「느티나무 정자 2」

 

소리는 방향을 바꿔 우리를 덮쳤다

순식간에 날아간 눈과 입을 찾느라

얼굴은 바닥을 짚고 같은 곳을 맴돌았다

 

다급한 군화발소리, 구석에 내몰린 채

우리가 본 것은 복면에 가려지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흔적 없이 버려졌지

 

찢어진 거울 속에는 타다 만 촛불들

불 꺼진 초를 안고 다시 모인 광장엔

뜨겁게 흐르는 꿈이 불티 되어 떠돈다

― 이송희, 「미얀마의 봄」

 

손영희 시조는 ‘느티나무 정자’를 배경으로 하여 그 안팎으로 쌓여간 시간을 응시한 작품이다. 한때 성업 중이던 느티가 폐업을 선언하자 외곽으로 떠돌던 먼지들만 붐비고 있다. ‘나무/먼지’의 대비 속에서 우리는 느티나무 정자가 한동안 사람들을 불러 모았던 진원지였음을 암시받는다. 이때 시인은 이제 느티나무가 만든 그늘을 누가 깨끗하게 닦을 것인가 하고 묻는다. 그 그늘은 한때 마을 속 누구라도 구중궁궐처럼 깃들이던 곳이고,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섬처럼 주저앉던 안식처가 아니었던가. 손영희는 그러한 그늘의 흔적을 탐사하면서 사라져간 시간들과 함께 어머니의 가없는 노동과 그에 대한 그리움을 한꺼번에 얹고 있다. 이송희 시조는 최근 외신을 통해 우리가 접하는 미얀마 군부 쿠데타 사태를 다루고 있다. 시의적인 의제일 뿐만 아니라 시조가 동시대 현실에 개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소중한 발화라고 할 수 있다. 순식간에 사라진 이들의 눈과 입과 얼굴이 바닥을 짚고 맴돌 때, 우리는 “다급한 군화발소리”에 흔적 없이 버려진 존재자들 사이에 개입했을 폭력의 강도를 끔찍하게 느낀다. “찢어진 거울”에 비친 “타다 만 촛불들”이 다시 광장에 모여 “뜨겁게 흐르는 꿈”을 불티로 만들어 ‘미얀마의 봄’은 올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40년 전 광주의 봄이 오버랩되면서 우리는 그 어떤 폭력도 거절되어야 함을 노래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따라가게 된다. 이처럼 손영희와 이송희 시조는 각각 제재와 어조 면에서 시조 본래의 구심과 원심을 충실하게 구현함으로써 시조의 다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최근 우리는 자유시와 거의 구별하기 힘든, 혹은 시조 양식을 충격적으로 해체하려는 파격의 양식들이 다양하게 목도하고 있다. 물론 이는 시조 양식의 다양한 분기와 자연스런 진화를 보여주는 첨예한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시조가 창사唱詞로서의 굴레를 벗어나 이제는 문자예술로서의 성격만 남아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별 필연성도 없이 율독적 배려를 형식화한 율격을 함부로 해체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읽고 있듯이, 이번에 발표된 《시조21》 시편들은 그 내용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전적 혜안을 한결같이 견지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4. 현대인의 삶과 사유를 환기하는 새로운 발상과 작법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정형시와 자유시 사이의 가장 주된 차이는 이른바 율격의 원리에 있다. 예컨대 정형시에는 선험적 율격 원리가 주어져 있다. 그것을 충족하지 않으면 결코 정형시가 될 수 없는 최소한도의 충족 요건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자유시의 경우에는 그 어떤 선험적 원리도 주어져 있지 않고 시를 쓰는 이의 내적 호흡에 따른 자유로움만이 사후적 필연성으로 부여될 뿐이다. 물론 자유시 안에도 자유로운 율격이 있는 것이지, 율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 씌어지는 자유시는 줄글로 씌어지는 산문시 양식이 범람하는 데다 최소한의 내적 호흡에 바탕을 둔 운율마저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 율격 훼손의 한 극점을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점에서 우리 시조시인들이 현대시조의 음악성을 확장해가면서 율격의 원리를 구심적으로 성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부좌 틀고 앉아 미생전 엄니를 본다

 

양수의 간을 보며 시원을 찾아보니

 

잔잔한 명경수 위에 꽃잎 하나 젖는다

 

 

먼 초원의 꽃향기 품은 촉촉한 물안개

 

살며시 가라앉으며 가부좌 콧등에 맺힌다

 

콧등에 맺힌 이슬로 젖어오는 엄니 앞섶

 

 

가만히 눈을 감고 나를 찾으려 했으나

 

찾고자 한 나는 없고 온통 앞섶 향기

 

느슨히 풀린 마음자락 고쳐매도 한 생각

― 이승현, 「사모곡」

 

손바닥 크기만 한 화면에 박힌 얼굴

 

핏물 밴 흰자위만 거칠게 흔들린다

 

허공만 물고 가는 거리, 비틀대는 저 거리

 

 

스스로 빠져버린 스마트한 덫에 걸려

 

살아서 죽은 그림자 연거푸 밟고 간다

 

점점 더 멀어져가는 사람 사이, 빛 사이

― 김미정, 「스몸비smombie」

 

이 밤도 너를 찾는 이 밤도 너를 찾는

기타 치며 노래하는 키다리 중절모 사내

계룡산 계곡 언저리 기운 한낮 점심상에

 

뻐꾹새 울어 피는 산목련쯤 외로 두고

에움길 휘적여온 가긍한 몸맨두리

사람아, 숟가락 놓고 지갑을 열겠으니

 

삽짝에 귀를 걸친 식솔들의 두레상이

헐거운 다리를 세워 훈김을 펼쳐낼까

아카시 잎사귀 위로 햇살 반짝 부시다

― 서석조, 「사람아, 숟가락 놓고」

 

이승현 시조는 ‘사모곡’이라는 주제가 워낙 새롭게 창작되기 어려운 테마이기 때문에 시인으로서도 조심스러웠을 법하다. 그러나 새로운 이미지로 이 작품은 이승현 버전의 사모곡으로 우뚝할 것이다. 시인은 가부좌 틀고 바라보는 “미생전 엄니”의 모습에서 “양수의 간을 보며 시원을 찾아”간다. 그때 “잔잔한 명경수 위에 꽃잎 하나 젖는” 순간이 얼비친다. 콧등에 맺힌 “먼 초원의 꽃향기 품은 촉촉한 물안개” 이미지가 “이슬로 젖어오는 엄니 앞섶”으로 이어져갈 때, 시인은 눈을 감고 본래면목을 찾으려 했지만 그것은 “찾고자 한 나”가 아니라 “온통 앞섶 향기”였을 뿐이다. 한없이 고쳐매도 한 생각인 ‘사모思母’의 품이 넓고 깊게 다가온다. 김미정 시조는 ‘스몸비smombie’라는 이색적인 제목을 걸었다. 그것은 길을 걸으면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좀비처럼 걸어가는 ‘스마트폰 좀비’를 축약한 단어라고 한다. 그네들은 손바닥 크기만 한 화면에 스스로의 얼굴을 박고 허공만 물고 거리를 걸어간다. 액정 안에는 “핏물 밴 흰자위만 거칠게” 흔들릴 뿐이다. “스스로 빠져버린 스마트한 덫”이 “살아서 죽은 그림자”가 되어 점점 더 “사람 사이, 빛 사이”를 멀어지게만 한다고 시인은 쓴다. 모든 것이 사물화하고 인간과 인간의 대면 접촉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스몸비가 전해주는 시의성은 어쩌면 우리 시조가 무엇을 해야 할지까지 암시해주는 시선과 생각을 담고 있다 할 것이다. 서석조 시조는 기타 치며 옛 가요를 부르는 “키다리 중절모 사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 사내는 계룡산 계곡 언저리 점심상에서 뻐꾹새 울어 피는 산목련 외로 두고 “에움길 휘적여온 가긍한 몸맨두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때 시인은 삽짝에 귀를 걸친 식솔들의 두레상에서 얼핏 훈김을 발견하면서, 바로 그 순간 아카시 잎사귀 위로 비추는 눈부신 햇살을 이 캐릭터 위로 부조浮彫해준다. 소박하고 일상적인 한 장면을 통해 ‘사람’이 걸어온 일생을 견고하게 함축하고 있는 이 작품은 서석조 시조가 주변화한 존재자들을 따뜻하게 살피는 세계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맞춤하게 다가온다 할 것이다. 이처럼 이승현과 김미정과 서석조의 작품은 우리가 가장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대상들에게 새로운 착상과 해석을 부여하면서 자신만의 진경進境을 이루어가고 있다.

 

상생을 협의해 볼 선택권도 전략도 없이

꺾이면 죽는다며 가시 꼿꼿 세우고

철조망 잔뜩 붉히며 장미 꽃잎 키우는 중

 

준비는 빈틈없이 행동은 신속하게

겨울을 견디고 온 햇살 두께 가늠하며

속엣말 단단히 쟁여 눈맞춤을 준비하지

 

이웃한 저쪽 담장 꾹 다문 출입문에

바람조차 휴업인가 공고문이 걸려 있고

새소리 간간히 와서 빈 가지만 쪼아볼 뿐

 

가지를 쳐낸다는 발 없는 말 무성하고

뿌리 내린 좁은 땅에 콘크리트 쏟아져도

까짓거, 어깨를 겯고 꽃불 활활 피워내지

― 심석정, 「공단, 4월」

 

똬리 튼 홍목단이 향을 물고 앉았는데

못 본 척 먼지바람 먼 산만 휘감는가

꽃 피어 봄 한철이면 꽃이 져도 또 한철

 

입술 짓무르는 빌미라도 잡아챈 듯

물벼락을 맞을망정 주저하지 않았구나

그런 날 올 줄 알았지 삼동 같은 오뉴월

 

향기롭게 익어 터진 슬픔도 길이라면

헌 신발 끌고라도 지는 꽃을 따라가랴

견디다 견디다 못한 생몸살의 끝물에

― 한분옥, 「끝물」

 

기포 많은 모습으로 바닷가 짐 부린다

 

거듭거듭 지우면서 채워지는 풍경들

 

밀려온 파도소리에 온몸이 노곤하다

 

흘러간 시간들이 부표처럼 떠다니고

 

액자에 갇혀버린 한 무리 잿빛 갈매기

 

물결은 거품을 품고 먼 바다로 향한다

― 문수영, 「바다 이력서·2」

 

심석정 시조는 4월에 피어나는 꽃들의 모습을 ‘공단’이라는 비유적 공간을 택하여 담아내고 있다. 시인의 정교한 시선에 의해 ‘장미’는 어떤 선택권이나 전략도 없이 가시를 세운 채 철조망에 꽃잎을 피워내고 있을 뿐이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온 햇살 두께를 가늠해보면서 장미는 속엣말과 눈맞춤을 준비해온 것이다. 바람이 휴업을 하고 새소리는 빈 가지만 쪼아볼 뿐이지만, 장미는 가지를 쳐낸다는 “발 없는 말”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어깨를 겯고 꽃불 활활 피워”내려는 의지로 충일하기만 하다. ‘공단’의 외관을 구성하는 세목을 통해 장미가 온갖 난관을 뚫고 피어나는 신생의 장면을 피워 올리는 시인의 관찰과 표현이 실감을 더한다. 한분옥 시조는 섬세한 감각과 사유로 세상의 보편적 이법理法을 꾸려낸 가편이다. 가령 시인은 똬리 튼 홍목단이 향을 품은 장면과 먼지바람이 먼 산만 휘감는 장면을 대조시킨다. 꽃이 피는 화려함과 먼지만 이는 황량함이 세상을 이루는 이법의 양면성임을 노래한 것이다. 그렇게 “꽃 피어 봄 한철이면 꽃이 져도 또 한철”인 셈이다. 나아가 시인은 주저하지 않고 찾아온 “삼동 같은 오뉴월”에 “향기롭게 익어 터진 슬픔”이나 “헌 신발 끌고라도 지는 꽃”이 모두 우리의 ‘길’이고 따라가야 할 어떤 “견디다 견디다 못한 생몸살의 끝물”임을 노래한다. ‘끝물’이라는 말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이 움트고 있는 신생 지향의 작품이라 할 것이다. 문수영 시조는 ‘바다 이력서’라는 연작 가운데 하나이다. 바다는 마치 누군가의 이력을 담고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시인은 “거듭거듭 지우면서 채워지는 풍경들”을 “흘러간 시간들이 부표처럼” 떠다니며 만들어낸 순간들을 유추해본다. 액자에 갇혀버린 한 무리 잿빛 갈매기들이야말로 노곤하고 기포 많은 모습으로 바닷가 어딘가에 짐을 부리던 누군가의 실존을 환기하는 매개물일 것이다. 물결은 거품을 품고 먼 바다로 향하듯이, 흘러간 시간처럼 앞으로 흘러갈 시간이 시인을 어디론가 떠메고 이력서를 채워갈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바다라는 광활한 표상과 어딘가로 비상하려는 시인의 의지가 조우하면서 생겨난 이미지일 것이다. 이처럼 심석정과 한분옥과 문수영의 시조는 소재나 사유방식을 구투로 재현하지 않고 새로운 발상과 작법으로 현대인의 삶과 사유를 환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 또한 시조의 현대성 제고에 큰 도움이 되는 경우일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이번 《시조21》에 실린 시인들의 일부 작품을 통해 우리 시조의 내용적 다양성과 형식적 견고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들의 작품은 해체시형을 과도하게 시조 안에 도입하는 지향에 대해 항체를 형성하며, 정형의 울타리를 벗어나 시조의 정체성을 혼란케 하는 일을 형상적으로 비판하는 촉수를 드리우고 있었다. 우리는 시조의 고유 자질인 정형성이 시상詩想을 제한하는 불필요한 장애 요인이 아니라 그러한 형식을 통해서만 성취 가능한 불가피한 ‘존재의 집’임을 여기서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정형의 울타리를 통해 우리는 큰 스케일의 상상력으로부터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까지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장중한 서사와 함께 ‘충만한 현재형’으로 구축되는 순간성을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상상력과 정서가 정형 안에 잘 갈무리됨으로써 우리는 잘 짜인 고전적 감각과 인식을 경험할 수 있게 되고, 인간의 원초적이고 미분화된 정서와 통합적인 삶의 이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점에서 이번에 신작을 발표한 차세대 주역들에 대한 기대를 해봄 직하다고 생각된다. 《시조21》이 그러한 성과를 앞으로도 적극 담아내면서, 창간 20주년을 훌쩍 넘어서, 우리 시조의 생생한 현장이 되어주기를 거듭 소망해본다.

 

 

 

유성호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저서로 『정격正格과 역진逆進의 정형 미학』 등이 있음. 외솔시조문학상 등 수상.

 

 

시조의 양식적 구심을 지켜내는

기율로서의 정형성

 

 

유 성 호-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1. 차세대 주역들의 의욕적 성과

시조 전문지 계간 《시조21》이 창간 20주년을 맞았다. 우리 정형시의 미학적 정립과 창신創新과 국제적 확산을 위해 그동안 《시조21》이 기울인 공력이 돌올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파장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첨예하게 작동하고 있다. 《시조21》은 창간 20주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50인 50색’이라는 코너를 준비했는데, 이 글은 여기 발표된 신작들을 통해 우리 시조미학의 현재성을 살펴보려는 작은 기획이다. 《시조21》 창간 이후에 등단하여 《시조21》에 작품을 발표한 시인들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목록은 비교적 젊고 의욕적인 차세대 주역들의 성과를 조감鳥瞰해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들 작품이 지닌 특성을 중심으로 하여 최근 우리 시조가 걷고 있는 방향에 대한 부분적 진단도 이루어지리라 기대해본다. 가령 우리는 최근 우리 시조가 활발한 장르 변이 차원에서 정형성을 훼손하거나 내용적으로 의뭉한 난해성을 도입해가는 측면을 목도하곤 하는데 이러한 폐단을 이번 신작들이 어떻게 넘어서고 있는지를 찬찬히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 분 한 분마다 대표작과 신작을 실었지만 여기서는 불가피하게 몇몇 시인의 신작을 중심으로 논의해보고자 한다.

 

2. 착실하게 존중된 정형성의 기율

최근 시조시단에 문제적으로 대두하고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언뜻 자유시와 외양이나 속성에서 크게 구별되지 않는 작품들이 씌어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이는 현대시조의 다양한 분화 과정을 보여주는 필연적 현상일지도 모른다. 일정한 형식을 오래도록 견지해온 피로도가 있고, 예술이라는 것이 장르적 확장과 변형을 통해 자기 진화를 이루어가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왜 시조인가?”라는 실존적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많은 시조시인들이 형식 제약이라는 굴레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시조를 택하는가 하는 존재론적 의문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첨단의 디지털 시대에 이처럼 시조의 존재론을 거듭 묻는 것은 시조에는 시조 아니면 안 되는 어떤 고유한 내질이 존재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이번에 발표된 작품들이 정형성의 기율을 착실하게 존중해감을 발견하게 된다. 《시조21》이 어떤 해석안眼으로 시조시단을 충격해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살피는 일은 비평적으로 보아도 긴요한 몫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어제의 그 길 따라 꽃은 계속 피는데

새끼 먹이 꽉 물고서 집으로 갈 뿐인데

한 순간 찢어진 날개, 가해자는 없단다

 

유유히 건너왔던 칼바람 긴 얼음골,

역류의 급물살에도 깃 다치지 않았었지

책임 질 자국도 없이 반짝이는 투명벽

 

살금살금 몰려들어 포식하는 들짐승과

함께 날고 싶은 꽃잎들의 위로 앞에

끊어져 모로 누운 길, 경적 소리 태연하다

― 정경화, 「새의 길은 23번 국도에서 끊긴다」

 

복자기나무 층층나무 개나리 덜꿩나무

나뭇가지 쏘아 날려 봄햇살을 후린다

어둑한 시간의 뒤켠

묵은 잠이 스러지면

 

관절의 마디 깊이 그을렸던 고요의 날

저물었던 숨들의 가락진 목덜미엔

꽃그늘 한 뼘쯤 늘려

바람벽도 세워야지

 

팽팽한 실핏줄이 들뭇들뭇 달아오른

버들개지 방천길을 냅다 달리는 사람들

푸드득 날갯짓하며

꽃봉오리 열어야지

― 박지현, 「춘분」

 

정경화 시조는 서정성과 인식론의 균형 있는 결속이 안정감을 준다. 꽃은 “어제의 그 길”을 따라 오늘도 피어나는데 새끼 먹이 물고서 집으로 날아가던 새는 한순간 날개가 찢어지면서 길을 잃는다. 오랫동안 칼바람 긴 얼음골까지 깃 다치지 않고 날아왔던 새의 길이 그만 “반짝이는 투명벽” 앞에서 끊긴 것이다. 보이지 않는 벽에서 끊긴 새의 길은 “살금살금 몰려들어 포식하는 들짐승”과 “날고 싶은 꽃잎들”과 함께 기이한 삶과 죽음의 현장을 만들어낸다. “끊어져 모로 누운 길” 주위로 태연하게 울어대는 경적 소리야말로 방음벽으로 새의 길을 끊어놓은 인간의 우매한 폭력을 은은하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한 양상을 우화적으로 짚어내면서 그것을 생태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정경화의 서정과 인식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박지현 시조는 봄날 한복판에 어둑한 시간의 뒤켠에서 피어나는 꽃과 나무와 사람들을 관찰하고 표현한 결실이다. 그 세목은 “복자기나무 층층나무 개나리 덜꿩나무” 같은 꽃과 나무의 군집이거나 “버들개지 방천길을 냅다 달리는 사람들” 같은 이들이다. 시인은 봄햇살을 후리는 자연 앞에서 묵은 잠이 스러지고 저물었던 숨들이 걷히면서 팽팽한 실핏줄이 달아오르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그렇게 날갯짓하며 꽃봉오리를 열려는 의지는 자연의 것이기도 하겠지만, 춘분을 맞아 봄날의 활력을 스스로의 삶에 부여하려는 시인 자신의 정서적 몫이기도 할 것이다. 자수의 부분적 탄력을 통해 정형성의 묵수와 창신을 동시에 구현한 작품이다. 두 편 모두 생명의 옹호가 지극히 아름다운데, 특별히 시의성을 도입하면서 정형성을 완미하게 성취한 것이 시선에 환하게 들어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콧노래가 넘나드는 숙자네 바자울이

앙바틈한 오르막에 어깨를 내어주던

어스름 마실 가는 길은

언제라도 좋았다

 

은현면 고갯길이 까마득해 보여도

엄마 손만 잡으면 단숨에 넘어섰지

외삼촌 두툼한 손이

기다리던 삼거리

 

가쁘게 넘어서고 뒹굴었던 진흙탕엔

기꺼이 몸을 내준 길의 품이 새롭다

막히면 새 길을 열던

해달별길 한나절

― 정용국, 「길의 위안慰安」

 

명절에 제사에 녹록찮은 지난 세월

시간 위를 걸어온 종가의 맏며느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일상의 의무처럼

 

병일까 구세주일까 세상 뒤흔든 코로나

명절도 안 된다고 가족도 안 된다고

덕분에 고단한 시간 한 번에 날아갔네

― 김선희, 「날아간 걱정」

 

거품 나는 풋 맛이 단맛이 되기까지

내 안에 나를 찾아 쉬지 않고 걸어온 길

뼈 깎는 인고의 시간 차곡차곡 쌓였지

 

살갗이 탈 것 같은 땡볕을 견뎌내며

몰아치는 천둥 번개도 가슴에 묻은 나날

때로는 견딜 수 없어 불면의 밤 보냈지

 

풋 맛을 익히려고 부단히 걸어온 길

무서리 내리는 밤 우연히 알게 되었지

내 몸에 단내 나는 걸, 참 진정한 내 모습

― 이솔희, 「한 알 대추의 독백」

 

정용국 시조는 길 위에서 삶의 위안을 찾아가는 서사적 온축 과정을 담았다. 가령 어스름 마실 가는 길은 “콧노래가 넘나드는 숙자네 바자울”이 어깨를 내어주었기 때문에 삶의 빛나는 순간을 담고 있었고, 양주 은현면 고갯길은 외삼촌의 두툼한 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엄마 손만 잡고도 단숨에 넘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애의 곡절마다 스스로 가쁘게 넘어서고 뒹굴었던 진흙탕처럼, “기꺼이 몸을 내준 길”들은 삶이 막힐 때마다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던 “해달별길 한나절”을 온전히 담고 있었던 셈이다. ‘길’이라는 유동流動의 상징을 통해 끝없이 위안을 받아온 세월을 넉넉하게 함축하고 있는 작품이다. 흐름에 막힘이 없다. 김선희 시조는 종가 맏며느리가 걸어온 세월을 톺아보는 시편이다. 명절에 제사에 녹록찮은 시간들이 어쩌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일상의 의무처럼” 다가옴을 느끼고 있는 시인은 병인 듯 구세주인 듯 찾아온 감염병이 “고단한 시간”을 한 번에 날려 보냈다고 쓴다. 내면에 쌓였던 걱정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날아간 걱정’은, 물론 반어적 의미를 부분적으로 담고 있지만, 역으로 그동안 변하지 않는 의무처럼 강제되어온 며느리로서의 일상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던지는 위안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소품이지만 단단한 진정성을 풀어낸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솔희 시조는 오랜 시간의 흐름을 형상적으로 담고 있다. 물론 그러한 불면과 인고의 시간을 독백으로 토로하는 화자는 ‘한 알 대추’다. 이러한 의인화의 결과로 화자는 풋 맛이 단맛이 되기까지 그리고 “내 안의 나”를 찾아온 오랜 길을 시간의 등가물로 토로한다. 뼈를 깎는 견딤의 시간은 “몰아치는 천둥 번개도 가슴에 묻은 나날”을 품고 부단히 걸어온 길로 이어져갔다. 결국 화자는 무서리 내리던 밤에 단내 나는 순간을 통해 “참 진정한 내 모습”을 찾게 된다. 그렇게 이 작품은 일종의 성장 서사를 품으며 인고의 시간이 자신을 성숙시켜가게 된 인생론적 진실을 설파하고 있다.

두루 알다시피 시조는 우리 시대에도 연면한 생명력과 영향력과 파생력을 가지면서 그 저변을 확대해가고 있는 현재 진행의 장르다. 견고한 생명력과 폭 넓은 자기 갱신 가능성을 가진 채 우리가 보유한 가장 독자적인 시 양식으로 면면하게 발전해가고 있다. 이는 시조 양식이 우리 민족의 성정性情이나 사유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특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시조를 지나 현대시조로 존재를 옮겨오면서 시조 양식의 본래적 특성들은 많은 변화를 치렀는데, 그것은 현대시조는 현대인의 복합적인 정서와 인식을 담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정용국과 김선희와 이솔희의 시조는 그러한 현대인의 일상을 잘 담아낸 결실로서, 그 안에는 그들이 오래도록 기다리고 축적해온 시간의 ‘길’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3. 내용적 다양성과 고전적 혜안

최근 우리 시조는 활발한 외관을 띠면서 민족 시형으로서의 위상과 미학을 한층 수준 높게 구축해가고 있다. 시조 시단의 인적 구성이나 매체적 조건도 활력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고, 자연스럽게 이러한 흐름은 시조로 하여금 현대성을 개척해가는 양식으로 거듭나게끔 해주었다. 물론 그러한 흐름 가운데서도 시조는 정형의 한계와 가능성을 감안하면서 특유의 균형과 절제의 정형성을 지속적으로 구현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시조 양식의 율격적 구속을 최대한 허물면서 미학적 확장을 꾀하려는 작품들도 적지 않게 씌어지고 있는데, 이번 《시조21》에 발표된 시편들은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면서 정형성을 의식하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확장과 응축이라는 조심스러운 변형들은 있지만 정형성 자체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실험적 의도는 보이지 않아 적잖이 안도감을 준다. 그만큼 우리 시조는 정형의 강화와 이완, 그리고 전통적 정서의 재확인과 현대적 감각의 도입 사이에서 심하게 길항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을 갖자마자 어제를 다 버렸다

저녁이 오기도 전 그마저 또 버렸다

내일을 몹시 탐하는 여전한 중독이다

 

누구나 그럴 거야 너스레를 떨다가도

아무도 없을 거야 나무라며 살아가지

어렵다 하고많은 날 하루를 거두는 일

― 이숙경, 「수국이 세 번 피고 세 번 지는 동안」

 

한 방울 젖을 찾듯 옛 주조장을 찾아간다

 

봄바람 불어와 누룩 섞인 꽃들 피고

 

술 없는, 외로운 봄날은 어둑어둑 소금 피고

 

 

만다라 뿌리 숨은 빈 들길 가는 동안

 

쏟아질 듯 기우뚱 탄식도 엎지르며

 

웃음의 모종을 사러간다 물이 불로 번지도록

 

 

물 빠진 저수지 같은 김빠진 인생이

 

구릉마다 산수유 꽃 취기 일어 피어오르고

 

낮달은 양은 술잔처럼 찌그러져 찾아온다

― 선안영, 「좋은 날」

 

이숙경 시조는 시간예술로서의 본령을 지키면서 그 시간이 결국 어떤 존재 생성의 계기를 품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수국이 세 번 피고 세 번 지는 동안이니 짧은 시간은 아니다. 시인은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자명한 선형적 시간 속에서 “여전한 중독”으로 어제를 버리고 저녁을 버리고 내일을 탐해간다. 누구나 그럴 것이라지만 “하고많은 날 하루를 거두는 일”을 거두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라는 자각 아래 시인은 일상의 시간 속에서 속절없이 흘러가는 하고많은 날들을 두고 ‘수국’의 개화와 낙화를 세 번이나 배치한다. ‘누구/아무’도 그러한 흐름에서 예외가 아님을 단단한 정격 안에서 에둘러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선안영 시조는 옛 주조장을 찾아가는 상황 속에서 시작된다. 한 방울 젖을 찾듯 가는 마음이 “누룩 섞인 꽃들”과 “어둑어둑 소금 피고” 마는 봄날의 한복판을 보여준다. 그렇게 빈 들길을 가는 동안 시인은 탄식을 버리고 “웃음의 모종”을 사러 간다고 고백한다. 물이 불로 번지는 시간은 작품 제목인 ‘좋은 날’을 감각적으로 환기하면서 비록 “물 빠진 저수지 같은 김빠진 인생”일지라도 “산수유 꽃 취기”처럼 좋은 날로 번져가는 ‘주조장-누룩-술-취기-술잔’의 연쇄가 봄날의 도취와 피안을 순간적으로 느끼게 해주고 있다. 비교적 변격이 자유로운 시조로 좋은 날의 감각적 흔들림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이숙경 시조가 구심적이라면 선안영 시조는 원심적이다. 그러한 율격의 한계와 가능성이 우리 시조시단의 허리를 구성하고 있는 두 여성시인의 작품에서 저마다의 가능성으로 숨쉬고 있는 셈이다.

 

성업 중이던 느티가 폐업을 선언한 뒤

 

외곽으로 떠돌던 낯 두꺼운 먼지들만

 

물 만난 상춘객처럼 왁자하게 붐빈다

 

저 그늘을 누가 깨끗하게 닦을 것인가

 

마을 속 신록이며 늙음의 구중궁궐이던

 

밭에서 돌아오던 엄니가 섬처럼 주저앉던

― 손영희, 「느티나무 정자 2」

 

소리는 방향을 바꿔 우리를 덮쳤다

순식간에 날아간 눈과 입을 찾느라

얼굴은 바닥을 짚고 같은 곳을 맴돌았다

 

다급한 군화발소리, 구석에 내몰린 채

우리가 본 것은 복면에 가려지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흔적 없이 버려졌지

 

찢어진 거울 속에는 타다 만 촛불들

불 꺼진 초를 안고 다시 모인 광장엔

뜨겁게 흐르는 꿈이 불티 되어 떠돈다

― 이송희, 「미얀마의 봄」

 

손영희 시조는 ‘느티나무 정자’를 배경으로 하여 그 안팎으로 쌓여간 시간을 응시한 작품이다. 한때 성업 중이던 느티가 폐업을 선언하자 외곽으로 떠돌던 먼지들만 붐비고 있다. ‘나무/먼지’의 대비 속에서 우리는 느티나무 정자가 한동안 사람들을 불러 모았던 진원지였음을 암시받는다. 이때 시인은 이제 느티나무가 만든 그늘을 누가 깨끗하게 닦을 것인가 하고 묻는다. 그 그늘은 한때 마을 속 누구라도 구중궁궐처럼 깃들이던 곳이고,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섬처럼 주저앉던 안식처가 아니었던가. 손영희는 그러한 그늘의 흔적을 탐사하면서 사라져간 시간들과 함께 어머니의 가없는 노동과 그에 대한 그리움을 한꺼번에 얹고 있다. 이송희 시조는 최근 외신을 통해 우리가 접하는 미얀마 군부 쿠데타 사태를 다루고 있다. 시의적인 의제일 뿐만 아니라 시조가 동시대 현실에 개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소중한 발화라고 할 수 있다. 순식간에 사라진 이들의 눈과 입과 얼굴이 바닥을 짚고 맴돌 때, 우리는 “다급한 군화발소리”에 흔적 없이 버려진 존재자들 사이에 개입했을 폭력의 강도를 끔찍하게 느낀다. “찢어진 거울”에 비친 “타다 만 촛불들”이 다시 광장에 모여 “뜨겁게 흐르는 꿈”을 불티로 만들어 ‘미얀마의 봄’은 올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40년 전 광주의 봄이 오버랩되면서 우리는 그 어떤 폭력도 거절되어야 함을 노래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따라가게 된다. 이처럼 손영희와 이송희 시조는 각각 제재와 어조 면에서 시조 본래의 구심과 원심을 충실하게 구현함으로써 시조의 다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최근 우리는 자유시와 거의 구별하기 힘든, 혹은 시조 양식을 충격적으로 해체하려는 파격의 양식들이 다양하게 목도하고 있다. 물론 이는 시조 양식의 다양한 분기와 자연스런 진화를 보여주는 첨예한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시조가 창사唱詞로서의 굴레를 벗어나 이제는 문자예술로서의 성격만 남아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별 필연성도 없이 율독적 배려를 형식화한 율격을 함부로 해체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읽고 있듯이, 이번에 발표된 《시조21》 시편들은 그 내용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전적 혜안을 한결같이 견지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4. 현대인의 삶과 사유를 환기하는 새로운 발상과 작법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정형시와 자유시 사이의 가장 주된 차이는 이른바 율격의 원리에 있다. 예컨대 정형시에는 선험적 율격 원리가 주어져 있다. 그것을 충족하지 않으면 결코 정형시가 될 수 없는 최소한도의 충족 요건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자유시의 경우에는 그 어떤 선험적 원리도 주어져 있지 않고 시를 쓰는 이의 내적 호흡에 따른 자유로움만이 사후적 필연성으로 부여될 뿐이다. 물론 자유시 안에도 자유로운 율격이 있는 것이지, 율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 씌어지는 자유시는 줄글로 씌어지는 산문시 양식이 범람하는 데다 최소한의 내적 호흡에 바탕을 둔 운율마저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 율격 훼손의 한 극점을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점에서 우리 시조시인들이 현대시조의 음악성을 확장해가면서 율격의 원리를 구심적으로 성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부좌 틀고 앉아 미생전 엄니를 본다

 

양수의 간을 보며 시원을 찾아보니

 

잔잔한 명경수 위에 꽃잎 하나 젖는다

 

 

먼 초원의 꽃향기 품은 촉촉한 물안개

 

살며시 가라앉으며 가부좌 콧등에 맺힌다

 

콧등에 맺힌 이슬로 젖어오는 엄니 앞섶

 

 

가만히 눈을 감고 나를 찾으려 했으나

 

찾고자 한 나는 없고 온통 앞섶 향기

 

느슨히 풀린 마음자락 고쳐매도 한 생각

― 이승현, 「사모곡」

 

손바닥 크기만 한 화면에 박힌 얼굴

 

핏물 밴 흰자위만 거칠게 흔들린다

 

허공만 물고 가는 거리, 비틀대는 저 거리

 

 

스스로 빠져버린 스마트한 덫에 걸려

 

살아서 죽은 그림자 연거푸 밟고 간다

 

점점 더 멀어져가는 사람 사이, 빛 사이

― 김미정, 「스몸비smombie」

 

이 밤도 너를 찾는 이 밤도 너를 찾는

기타 치며 노래하는 키다리 중절모 사내

계룡산 계곡 언저리 기운 한낮 점심상에

 

뻐꾹새 울어 피는 산목련쯤 외로 두고

에움길 휘적여온 가긍한 몸맨두리

사람아, 숟가락 놓고 지갑을 열겠으니

 

삽짝에 귀를 걸친 식솔들의 두레상이

헐거운 다리를 세워 훈김을 펼쳐낼까

아카시 잎사귀 위로 햇살 반짝 부시다

― 서석조, 「사람아, 숟가락 놓고」

 

이승현 시조는 ‘사모곡’이라는 주제가 워낙 새롭게 창작되기 어려운 테마이기 때문에 시인으로서도 조심스러웠을 법하다. 그러나 새로운 이미지로 이 작품은 이승현 버전의 사모곡으로 우뚝할 것이다. 시인은 가부좌 틀고 바라보는 “미생전 엄니”의 모습에서 “양수의 간을 보며 시원을 찾아”간다. 그때 “잔잔한 명경수 위에 꽃잎 하나 젖는” 순간이 얼비친다. 콧등에 맺힌 “먼 초원의 꽃향기 품은 촉촉한 물안개” 이미지가 “이슬로 젖어오는 엄니 앞섶”으로 이어져갈 때, 시인은 눈을 감고 본래면목을 찾으려 했지만 그것은 “찾고자 한 나”가 아니라 “온통 앞섶 향기”였을 뿐이다. 한없이 고쳐매도 한 생각인 ‘사모思母’의 품이 넓고 깊게 다가온다. 김미정 시조는 ‘스몸비smombie’라는 이색적인 제목을 걸었다. 그것은 길을 걸으면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좀비처럼 걸어가는 ‘스마트폰 좀비’를 축약한 단어라고 한다. 그네들은 손바닥 크기만 한 화면에 스스로의 얼굴을 박고 허공만 물고 거리를 걸어간다. 액정 안에는 “핏물 밴 흰자위만 거칠게” 흔들릴 뿐이다. “스스로 빠져버린 스마트한 덫”이 “살아서 죽은 그림자”가 되어 점점 더 “사람 사이, 빛 사이”를 멀어지게만 한다고 시인은 쓴다. 모든 것이 사물화하고 인간과 인간의 대면 접촉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스몸비가 전해주는 시의성은 어쩌면 우리 시조가 무엇을 해야 할지까지 암시해주는 시선과 생각을 담고 있다 할 것이다. 서석조 시조는 기타 치며 옛 가요를 부르는 “키다리 중절모 사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 사내는 계룡산 계곡 언저리 점심상에서 뻐꾹새 울어 피는 산목련 외로 두고 “에움길 휘적여온 가긍한 몸맨두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때 시인은 삽짝에 귀를 걸친 식솔들의 두레상에서 얼핏 훈김을 발견하면서, 바로 그 순간 아카시 잎사귀 위로 비추는 눈부신 햇살을 이 캐릭터 위로 부조浮彫해준다. 소박하고 일상적인 한 장면을 통해 ‘사람’이 걸어온 일생을 견고하게 함축하고 있는 이 작품은 서석조 시조가 주변화한 존재자들을 따뜻하게 살피는 세계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맞춤하게 다가온다 할 것이다. 이처럼 이승현과 김미정과 서석조의 작품은 우리가 가장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대상들에게 새로운 착상과 해석을 부여하면서 자신만의 진경進境을 이루어가고 있다.

 

상생을 협의해 볼 선택권도 전략도 없이

꺾이면 죽는다며 가시 꼿꼿 세우고

철조망 잔뜩 붉히며 장미 꽃잎 키우는 중

 

준비는 빈틈없이 행동은 신속하게

겨울을 견디고 온 햇살 두께 가늠하며

속엣말 단단히 쟁여 눈맞춤을 준비하지

 

이웃한 저쪽 담장 꾹 다문 출입문에

바람조차 휴업인가 공고문이 걸려 있고

새소리 간간히 와서 빈 가지만 쪼아볼 뿐

 

가지를 쳐낸다는 발 없는 말 무성하고

뿌리 내린 좁은 땅에 콘크리트 쏟아져도

까짓거, 어깨를 겯고 꽃불 활활 피워내지

― 심석정, 「공단, 4월」

 

똬리 튼 홍목단이 향을 물고 앉았는데

못 본 척 먼지바람 먼 산만 휘감는가

꽃 피어 봄 한철이면 꽃이 져도 또 한철

 

입술 짓무르는 빌미라도 잡아챈 듯

물벼락을 맞을망정 주저하지 않았구나

그런 날 올 줄 알았지 삼동 같은 오뉴월

 

향기롭게 익어 터진 슬픔도 길이라면

헌 신발 끌고라도 지는 꽃을 따라가랴

견디다 견디다 못한 생몸살의 끝물에

― 한분옥, 「끝물」

 

기포 많은 모습으로 바닷가 짐 부린다

 

거듭거듭 지우면서 채워지는 풍경들

 

밀려온 파도소리에 온몸이 노곤하다

 

흘러간 시간들이 부표처럼 떠다니고

 

액자에 갇혀버린 한 무리 잿빛 갈매기

 

물결은 거품을 품고 먼 바다로 향한다

― 문수영, 「바다 이력서·2」

 

심석정 시조는 4월에 피어나는 꽃들의 모습을 ‘공단’이라는 비유적 공간을 택하여 담아내고 있다. 시인의 정교한 시선에 의해 ‘장미’는 어떤 선택권이나 전략도 없이 가시를 세운 채 철조망에 꽃잎을 피워내고 있을 뿐이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온 햇살 두께를 가늠해보면서 장미는 속엣말과 눈맞춤을 준비해온 것이다. 바람이 휴업을 하고 새소리는 빈 가지만 쪼아볼 뿐이지만, 장미는 가지를 쳐낸다는 “발 없는 말”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어깨를 겯고 꽃불 활활 피워”내려는 의지로 충일하기만 하다. ‘공단’의 외관을 구성하는 세목을 통해 장미가 온갖 난관을 뚫고 피어나는 신생의 장면을 피워 올리는 시인의 관찰과 표현이 실감을 더한다. 한분옥 시조는 섬세한 감각과 사유로 세상의 보편적 이법理法을 꾸려낸 가편이다. 가령 시인은 똬리 튼 홍목단이 향을 품은 장면과 먼지바람이 먼 산만 휘감는 장면을 대조시킨다. 꽃이 피는 화려함과 먼지만 이는 황량함이 세상을 이루는 이법의 양면성임을 노래한 것이다. 그렇게 “꽃 피어 봄 한철이면 꽃이 져도 또 한철”인 셈이다. 나아가 시인은 주저하지 않고 찾아온 “삼동 같은 오뉴월”에 “향기롭게 익어 터진 슬픔”이나 “헌 신발 끌고라도 지는 꽃”이 모두 우리의 ‘길’이고 따라가야 할 어떤 “견디다 견디다 못한 생몸살의 끝물”임을 노래한다. ‘끝물’이라는 말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이 움트고 있는 신생 지향의 작품이라 할 것이다. 문수영 시조는 ‘바다 이력서’라는 연작 가운데 하나이다. 바다는 마치 누군가의 이력을 담고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시인은 “거듭거듭 지우면서 채워지는 풍경들”을 “흘러간 시간들이 부표처럼” 떠다니며 만들어낸 순간들을 유추해본다. 액자에 갇혀버린 한 무리 잿빛 갈매기들이야말로 노곤하고 기포 많은 모습으로 바닷가 어딘가에 짐을 부리던 누군가의 실존을 환기하는 매개물일 것이다. 물결은 거품을 품고 먼 바다로 향하듯이, 흘러간 시간처럼 앞으로 흘러갈 시간이 시인을 어디론가 떠메고 이력서를 채워갈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바다라는 광활한 표상과 어딘가로 비상하려는 시인의 의지가 조우하면서 생겨난 이미지일 것이다. 이처럼 심석정과 한분옥과 문수영의 시조는 소재나 사유방식을 구투로 재현하지 않고 새로운 발상과 작법으로 현대인의 삶과 사유를 환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 또한 시조의 현대성 제고에 큰 도움이 되는 경우일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이번 《시조21》에 실린 시인들의 일부 작품을 통해 우리 시조의 내용적 다양성과 형식적 견고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들의 작품은 해체시형을 과도하게 시조 안에 도입하는 지향에 대해 항체를 형성하며, 정형의 울타리를 벗어나 시조의 정체성을 혼란케 하는 일을 형상적으로 비판하는 촉수를 드리우고 있었다. 우리는 시조의 고유 자질인 정형성이 시상詩想을 제한하는 불필요한 장애 요인이 아니라 그러한 형식을 통해서만 성취 가능한 불가피한 ‘존재의 집’임을 여기서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정형의 울타리를 통해 우리는 큰 스케일의 상상력으로부터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까지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장중한 서사와 함께 ‘충만한 현재형’으로 구축되는 순간성을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상상력과 정서가 정형 안에 잘 갈무리됨으로써 우리는 잘 짜인 고전적 감각과 인식을 경험할 수 있게 되고, 인간의 원초적이고 미분화된 정서와 통합적인 삶의 이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점에서 이번에 신작을 발표한 차세대 주역들에 대한 기대를 해봄 직하다고 생각된다. 《시조21》이 그러한 성과를 앞으로도 적극 담아내면서, 창간 20주년을 훌쩍 넘어서, 우리 시조의 생생한 현장이 되어주기를 거듭 소망해본다.

 

 

 

유성호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저서로 『정격正格과 역진逆進의 정형 미학』 등이 있음. 외솔시조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