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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시조 보급 열정 윤금초 시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2. 2. 23.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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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세상> 전통 시조 보급 열정 윤금초 시인

입력 2007. 07. 31. 15:42 수정 2007. 07. 31. 15:42 댓글 0

 

【서울=뉴시스】

시인은 아이처럼 들떠있었다. 구례·영암·완도·강진 그리고 해남 나들이. 남도 5곳을 돌며 만날 사람들 생각에 얼굴에선 환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이번에 찾아가는 5곳 모두 문화 소외지역입니다. 그곳 주민들에게 작으나마 알찬 문화의 향기를 선물할 생각입니다."

마지막 방문지 해남은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대흥사와 땅끝마을, 그리고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한 황토와 바다가 있는 곳. 어디선가 육자배기 가락이 흘러나오면 저절로 흥겨워 시 한 수 읊을 것 같은 곳으로 기억한다.

시골 마을들을 돌며 시인은 시조문학 강연과 시조 낭송회·시조 창과 판소리 공연 등을 선보인다. 동학사와 책만드는집 등 출판사에서 협찬한 문학서적도 나눠줄 예정이다.

이지엽·정평림씨 등 현역 시조시인 60여 명과 함께 7월 31일부터 8월 5일까지 여는 이번 행사의 정식 명칭은 '2007 신나는 예술여행'. 2005년부터 이어와 올해로 세 번째인 이 행사는 윤금초(64) 시인이 대표로 있는 '열린시조학회·민족시사관학교'가 주관한다. 정확히 말하면 윤 시인이 마련하는 행사라는 것이 맞다.

사람들은 "몸도 성하지 않은 분이 왜 그리 바쁘게 사시느냐"고 말린다. 그래도 시인은 늘 바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늘 스스로 일거리를 만들어 바쁘게 산다. 10여 년 전에 고혈압으로 쓰러졌던 병력을 지닌 사람으로선 무리한 스케줄을 스스로 만들어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문학은 곧 나눔'이라는 그의 신념 때문이다.

'윤금초'라면 문단에선 너무 알려진 이름이다. 시조 부문에서는 더욱 그렇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의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오래 맡았고 각종 강좌를 통해 길러낸 제자만도 수백 명에 이른다. 연륜과 명성에 걸맞게 편하게 누리고 살 위치다. 그래도 백담사에서 해남까지를 누비며 이 땅의 민초들에게 시조를 읽어주고 판소리를 들려준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찾아가는 문학'이다.

윤 시인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12대 후손이다. 당연히 고산이 여생을 마쳤던 유배지 해남의 화산면 갑길리 출신이다.

출생 신고를 몇 년 뒤로 미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절, 둘째 누나와 함께 호적에 기재되면서 생년월일이 서로 바뀌었다. 43년생인데 호적에는 1941년 8월생으로 등재됐다. 이 탓에 초등학교부터 남들보다 2년 먼저 입학했다. 윤 시인은 스스로 인생을 가불하며 살았다고 말한다.

고향의 화산중학교를 졸업한 시인은 광주 조선대부고에 입학해 문학을 만난다.

헌 책방에서 구한 한국문학선집에서 김동리의 소설과 서정주의 시가 그를 문학으로 끌어당긴 것이었다.

문학의 출발은 시조가 아니었다. 고교 백일장에서 단편소설이 입상하는 등 산문에 소질을 보였으며 서라벌예대(지금의 중앙대)에 입학하고 나서도 소설을 전공했다.

당시 서라벌예대에는 김구용·김동리·박목월·서정주·이범선·임동권 등 쟁쟁한 문인들이 출강하고 있었는데, 대학 2학년 때 박목월 선생은 윤 시인의 시가 시조의 호흡에 가깝다며 시조를 쓰라고 권유했다.

윤 시인은 목월의 권유도 있었지만 선조인 윤선도에 대한 일종의 의무감(?)도 자신을 시조시인의 길을 걷게 했다고 회고했다.

윤 시인은 문단 등단 과정에서 남다른 과정을 겪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 그는 파병된 아우에 대한 절실한 염려와 그리움을 담은 시조 '安否(안부)'를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했지만 예심도 통과하지 못한 채 낙선했다. 오기인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신감인지 그는 이듬해인 1968년 똑같은 내용의 시조 '안부'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전년에 예심도 통과하지 못했던 그의 작품은 이은상·김상옥 선생이 심사를 맡은 그 해에 당당하게 당선했다. 우리나라 신춘문예 역사에 한 작품을 가지고 '한 번의 낙선과 한 번의 당선'이라는 진기록을 남긴 것이다.

등단 10년만인 1977년 첫 시조시집 '어초문답'을 발간한 시인은 '해남나들이'(93년) '땅끝'(2001년) 등 시조집을 출간했으며, 공동시집 '네 사람의 얼굴'(83년), '다섯 빛깔의 언어풍경'(95년), 에세이집 '갈봄여름없이'(80년),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의 사랑'(92년), '시조짓는 마을'(98년) 등을 세상에 내놓았다. 정운시조문학상(86년)·민족시가문학대상(91년)·중앙시조대상(93년)·가람시조문학상(99년) 등 시조시단의 굵직굵직한 상들을 섭렵해 시조문단에선 '일가를 이룬' 시인으로 평가된다.

이런 그가 왜 '찾아가는 문학'을, '들려주는 시조'를 고집할까.

그는 시조(時調)라는 명칭에서 우선 그 이유를 찾는다. '시조'의 '시'자에 글 '詩'자가 아닌 때 '時'를 썼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때 '時'를 쓰는 시조는 당대의 정서, 당대의 시대상황을 담는 문학 양식이라고 풀이한다. 일반적으로 시조가 옛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늘의 현실을 담는 것이 시조라는 것이다.

둘째로 그는 시조가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 형식임을 강조한다. 온전한 우리만의 것이기에 더 대중화돼야 하고, 세계문학에서 다른 장르보다 더 내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신념으로 그는 '오늘의 시조학회'를 만들어 20년을 꾸려왔다. 단지 시조를 쓰거나 배우는 사람들의 동호회가 아니라 우리만의 문학인 시조의 대중화와 '부흥 운동'을 펼쳐온 것이다.

2005년부터는 광화문에 민족시사관학교를 열어 시조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시조의 작법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시인은 시조를 들려줄 사람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간다. 광주에서 시조축제도 열고, 담양에선 청소년 시조캠프도 연다. 해마다 열리는 백담사 만해축전엔 빠짐없이 단골손님으로 참석해 시조 대회를 연다.

그만큼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시조에 대한 자부심도 높다.

99년 서울대 권영민 교수가 문학사상사의 '가람시조문학상'을 주관하고 있을 때였다. 시인이 가람시조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시인이 이를 정중하게 사양했다. 같은 날 시상하는 소월시문학상의 상금이 500만 원인데 가람시조문학상은 200만 원이었다. 돈이 적어서가 아니라 같은 문학으로서 소월시문학상보다 가람시조문학상 상금이 적다는 것은 시조의 자존심 때문에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도쿄대 교환교수로 일본에 체류하던 권영민 교수가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듣곤 가람시조문학상 상금을 500만 원으로 올렸다. 시조의 문학적 위상을 위해 문학적 투쟁을 한 셈이다. 이 일로 시인은 1999년 '문학사상' 12월호 표지의 인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시인은 이번 '2007 신나는 예술여행'을 마치면 8월 만해축전에서 '시조 한마당'을 열고 가을엔 다시 소외지역 순례를 계획하고 있다. 시조를 위해 삶 전부를 내던진 모습이다.

밥공기는 밀어둔 채 낮술이 소주 한 병을 넘었을 때 시인은 자신의 작품 '땅끝'을 노래하듯 들려줬다.

<반도 끄트머리 / 땅끝이라 외진 골짝 / 뗏목처럼 떠다니는 / 전설의 돌섬에는 / 한 십년

내리 가물면 / 불새가 날아온단다. / 갈잎으로, 밤이슬로 / 사쁜 내린 섬의 새는 / 흰 갈기, 날개 돋은 / 한 마리 백마였다가 / 모래톱 은방석 위에 / 둥지 트는 인어였다.…>

주량이 보잘 것 없는 기자에게 "한 잔만 더"라며 잔을 건네던 시인이 불쑥 "해남 같이 안갈래?"라고 권해왔다. 황토가 어머니 품 같던 곳. 문득 그곳이 모진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온종림 기자 noorie@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