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大 문리대 국문科, 同 대학원 졸업. 조선일보·한국일보 논설위원, 경향신문 파리특파원, 도쿄大ㆍ국제일본문화연구소 객원교수, 문화부 장관, 이화여대 석좌교수, 새천년주비위원회 위원장 역임. 저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공간의 기호학」, 「이어령 라이브러리」(전 30권) 외 다수.
[진행·정리]
李相欣 월간조선 기자〈hanal@chosun.com〉
李相姬 월간조선 조사요원〈gwiwon27@chosun.com〉
조조(曹操)는 두통이 날 때마다 진림(陳淋)의 글을 읽었다고 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아픈 것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원소(袁紹)」의 편에서 자신을 비방해 오던 진림이 포로로 잡혀 왔을 때에도 벌하지 않고 문서계로 등용시켰다. 중국에서는 그래서 명문(名文)을 쓰는 일을 경국지대업(傾國之大業)이라고까지 했다.
名文을 쓰려면 우선 「달이 밝다」와 「달은 밝다」의 그 차이부터 알아야 한다. 「이」와 「은」의 조사 하나가 다른데도 글의 기능과 그 맛은 전연 달라진다. 「달이 밝다」는 것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달이 환히 떠오른 것을 나타내는 묘사문(描寫文)이다. 그러나 「달은 밝다」는 달의 속성이 밝은 것임을 풀이하고 정의하고 있는 설명문이다.
이태백의 시(詩)에 「내 어릴 적 달이라는 말을 몰라 이름지어 부르기를 『백옥의 쟁반』이라고 했느니」라고 노래한 것이 있다. 묘사문은 마치 달이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가 달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쓰는 글이다. 습관이나 고정관념의 굳은살을 빼면 늘 보던 사물들도 새롭게 보일 것이다.
「낯익은 것을 낯설게 하기」
이것이 묘사문의 효과이며 그 특성이다. 그리고 그 글들은 항상 「지금, 여기」라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개체(個體)로 존재한다.
그러나 설명문은 정반대로 「낯선 것」을 「낯익은 것」으로 만들어 주는 글이다.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고쳐 주고 모르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옮겨놓는 사전의 낱말 풀이 같은 글이다. 「지금, 여기」의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떠오르는 달이 아니라 백과사전의 도해(圖解) 속에서 운행(運行)되고 있는 세계의 달, 무한 속의 달이다.
그러니까 기행문은 묘사문이요, 여행 안내서는 설명문이다. 어느때 묘사문을 쓰고 어느 때 설명문을 써야 하는지,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되면 글쓰기의 반은 이미 성공한 셈이다.
뷰폰의 유명한 정의 「문체(文體)는 인간이다」라는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같은 인격체라도 편지글을 쓸 때와 일기를 쓸 때, 그리고 수필을 쓸 때와 소설을 쓸 때의 그 문체는 달라진다. 사람에 의해서 문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제에 따라서 문체는 변화한다.
문체는 외출할 때 옷을 입는 것과 같다. 일하려고 나가는 것인지, 파티장에 가는 것인지, 혹은 가는 데가 장례식장인가 결혼식장인가에 따라 옷의 선택이 전연 달라진다. 문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제이다. 그리고 그 주제는 문장의 형식과 내용이 잘 어울릴 때 비로소 그 특성을 나타낸다. 형식에 치우진 글은 불꽃과 같은 것이고 내용에만 치우친 것은 수풀과 같은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서로 긴장관계를 이루며 손바닥과 손등처럼 서로 뗄 수 없는 것이 될 때 진정한 문체는 획득된다. 불꽃도 숲도 아닌 「불타오르는 숲」, 미국의 비평가 마크 숄러가 한 말이다.
병렬법을 활용하라
「달처럼 보이다가 별처럼 보이다가, 나비처럼 보이다가 티끌처럼 보이다가 염치고개를 넘어간다」
춘향이가 이도령과 이별하는 장면을 읊은 판소리의 한 대목이다. 멀어져 갈수록 점점 작게 보이다가 고개 너머로 사라져 버리는 이도령의 모습이 불과 네 개의 단어로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달이 별처럼 작아진 다음에 어째서 별보다 큰 나비가 등장하는가. 선형적인 글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그 대목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달은 별과 짝이 되어 이도령의 얼굴 모양을 나타내고 나비는 티끌과 대비하여 이도령의 걸어가는 동작을 나타낸 병렬(竝列) 구조로 파악하면 그 절묘한 표현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된다. 달과 별은 정태적(靜態的)인 것이고 나비와 티끌은 날아다니는 것으로 동태적(動態的)인 것이다. 크고 작고 정태적이고 동태적인 네 단어의 병렬적 구조에 의해서 멀어져 가는 이도령의 모습과 작아져 갈수록 커져 가는 춘향이의 별리(別離)의 정감이 아무런 설명 없이 직물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詩든, 산문(散文)이든 名文의 조건은 지엽적인 비유나 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글의 구조 자체에 의해서 결정된다. 용비어천가의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 역시 그러한 병렬법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예수의 수사학(修辭學)
예수는 똑같은 주제를 각각 다른 세 가지 우화로 보여 준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와 짐을 버려두고 땅 위에 떨어진 한 알의 곡식을 줍는 농부의 이야기와 그리고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오자 오히려 더 성대한 잔치를 열어 주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똑같다. 그러나 첫 번째 이야기는 양치는 유목민(遊牧民)의 경우를 예로 든 것이며, 두 번째 이야기는 곡물을 가꾸는 농경민(農耕民)의 경우를 두고 한 소리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자식을 키우는 어버이의 심정을 예로 든 것이다. 그러니까 그 유명한 세 가지 우화는 메시지보다도 메시지를 받는 사람(청자)을 더 중시했던 예수님의 수사학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생산양식이 다르고 생활양식과 그 문화가 달라도 다같이 느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둔 것이다.
名文이란 어느 때 어디에서 누가 읽어도 감동을 받을 수 있게 한 글이다. 시대와 생활공간이 달라도 제가끔 자신의 체험으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교가 세계의 종교가 된 것도 바로 유목민이나 농경민의 어느 특정한 부류에 한정시키지 않고 모든 문화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과 다원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일반화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토착적인 문화에 수사(修辭)의 밑뿌리를 둔다.
시인(詩人) 예이츠는 번역권을 보류한다고 했지만, 참으로 좋은 글은 번역을 해도 역시 좋은 글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어느 나라에서나 베스트 셀러가 된 성서(聖書), 그래서 성서의 글들은 명문의 전범(典範)이 된 것이다.
참으로 기량이 있는 상 목수는 못질을 하지 않는다. 못 하나 박지 않고 집 한 채를 짓는다. 억지로 못질을 하여 나무를 잇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아귀를 맞추어 균형과 조화로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문장과 문장을 이어가는 기술도 마찬가지이다. 서툰 글일수록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와 같은 접속사의 못으로 글을 이어간다. 그런 그을 읽다 보면 못을 박는 망치 소리처럼 귀에 거슬리게 된다. 잘 다듬어진 글의 이미지와 리듬은 인위적으로 접속사를 붙이지 않아도 자석처럼 서로 끌어당기고 어울려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글의 앞머리만이 아니다. 글을 맺는 종지형도 마찬가지이다. 서툰 글일수록 「것이다」로 끝맺는 일이 많다. 한 글에 「것이다」를 몇 번 썼는가. 「그리고」, 「그러나」와 같은 접속사를 얼마나 썼는가 하는 기계적인 통계만으로도 악문(惡文)과 名文을 구별해 낼 수 있다.
구양수(歐陽修) 베개
옛날 문장가들은 名文을 쓰기 위해서 구양수 베개를 베었다. 구양수 베개란 울퉁불퉁한 옹이가 많이 박힌 목침(木枕)을 뜻한다. 그것을 베면 편안치가 않아서 잠에 깊이 빠지질 않는다. 그 어렴풋한 선잠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그 한가운데서 보통 때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문장들이 떠오른다. 구양수의 名文들은 실제로 비몽사몽 간에 쓰여진 것들이라고 한다.
구양수 베개는 名文章은 깊이 생각하고 끝없이 상상하는 그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남들이 높은 베개를 베고 편안한 잠에 취해 있을 때 눈 떠 있는 자. 그 불면의 밤 속에서 어둠 속에서 名文은 알을 까고 나온다.
지금 인터넷으로 글쓰기가 다시 세계적으로 번져가고 있다. 이메일, 채팅, 그리고 게시판과 자료실에 글을 써서 올리는 기회가 날로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글쓰기의 소중함과 그 힘을 제대로 깨닫고 있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
조조(曹操)가 아니라도 명문을 읽으면 머리가 맑아진다. 누구나 조조가 되고 누구나 진림이 되는 세상이 와야 한다. 그것이 인터넷 시대의 진정한 즐거움이요 행복이다.
(출처: 「한국의 名文」-월간조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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