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의 날에 시인 고정희를 재평가하다
-이승하 시인
이 글은 세계 여성의 날, 올렸던 글, <옮김>
고정희 시인은 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였고,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현대시학』에 <연가>가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목요시’ 동인으로 활동했습니다. 1983년 『초혼제』로 ‘대한민국문학상’을 탔습니다. 시세계가 한창 무르익고 있을 무렵인 1991년,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 사고로 작고했습니다.
고정희는 시를 쓰는 한편 광주 YWCA 간사와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 가정 법률 상담소 출판부장 등을 지내며 사회 활동을 했고, 특히 1980년대 초부터 여자와 남자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이 서로 평등하고 자유롭게 어울려 사는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여성주의 공동체 모임인 ‘또 하나의 문화’에 동인으로 참여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죽음의 강을 건너기 위한 긴 노래
ㅡ고정희의 장시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
이승하
1. 무가, 민중의 바람을 담은 노래
주검은 어디에나 있다. 신문지상의 부고란과 명절날 제사상의 지방에서 우리는 주검을 연상하며, 장례일과 현충일에도 수많은 주검을 떠올린다. 삶이 없었더라면 죽음 또한 없었을 터. 그러기에 죽음은 모든 생명체가 맞이해야 할 마지막 현실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흐르는 강은 넓고도 깊다. 시간의 강은 삶과 죽음을 분리하여, 생자와 망자를 완벽한 타자로 만든다. 강의 양안에 선 생자와 망자가 같은 공간에 존재할 수는 없다. 이승과 저승은 건너갈 수 없는,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지극한 정성으로 신들의 힘을 빌어 한 척의 배를 만든다. 그 배의 이름은 굿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의 세계로 가버린 망자를 불러 그의 혼을 달래주기 위해 살아 있는 식구들이 정성을 모아 마련한 배인 굿판. 삶과 죽음 사이에 흐르는 강 위에서 무당은 춤추고 노래함으로써 배를 저승의 기슭으로 나아가게 한다. 무당에 관한 옛 기록을 찾아보면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 유리왕 편에 나와 있어 그 연원은 기원전과 후의 경계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 위에 뜬 그 배에서 우리는 지난 2천 년 동안 무당의 권능에 의지해 신을 불렀고(請神), 신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했고(降神), 신을 맞이했고(迎神), 신과 놀았으며(娛神), 신을 다시 저승으로 보냈던(送神) 것이다. 신과 인간의 만남 및 생자와 망자의 만남은 내림굿이나 다리굿, 혹은 씻김굿 같은 소규모의 굿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한 마을 사람들 전부가 정성을 모아 마을의 안녕과 생업의 번영을 비는 두레굿이나 대동굿에도 있었다.
굿판에서 신과 인간이 더불어 흥겹게 놀기 위해서는 무당이 노래를 해야 한다. 신을 불러오고 인간이 신과 함께 놀게 하는데 무가가 빠질 수 없다. 무가의 기본적인 요건은 음악적 가락과 문학적 사설이다. 음악적 가락은 청중의 신명을 돋우어 마음을 엑스터시의 경지로 몰아넣고, 문학적 사설은 청중을 머나먼 저승의 기슭으로 안내해 망자와 만나게 해줌으로써 잠시나마 생사를 초월케 한다. 생사를 초월한다는 것, 죽음의 강을 건넌다는 것은 내일-저곳에서의 삶을 중시해서가 아니라 오늘-이곳에서의 삶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굿을 통해 일상적인 삶에서 해소되지 못한 원초적 욕구의 맺힘과 사회적 갈등에서 오는 온갖 억눌림을 풀어왔다. 또한 굿을 통해 비명에 가 떠도는 혼을 죽음의 세계로 완전히 보낸 뒤 삶을 더욱 충실히 가꾸어왔다. 굿은 어찌 보면 망자와의 인연을 끊으려는 행위이며, 이승에서의 삶에 더욱 집착하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무가 속에는 청승도 애소도 곡성도 들어 있지만 그 밑바닥에 고여 있는 것은 현실 상황을 딛고 일어서는 민중의 다부진 힘, 신분 제약을 뚫고 나아가는 민중의 끈질긴 집념이다. 무당은 부정한 일을 담당하는 신들을 달래고(부정거리), 잘 먹고 잘 살고 싶어하고(성주풀이), 재생과 여성해방을 염원하고(바리공주),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고자 길닦음을 하며(씻김굿), 잡귀마저 초청해 풀어 먹이는(거리굿) 긴 절차를 노래로 풀어 가는데, 여기에는 민중의 바람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 밤을 새며 부르는 무가에서 놀이의 기능을 배제하면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광녀의 고함에 지나지 않는다. 무가가 신명의 드러냄이나 정서적 유희가 아니라면 공허한 하소연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무가에서 의사 표현의 기능을 완전히 배제하면 오락으로 떨어져 예술적 향기를 풍기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열두거리 과정에서 듣게 되는 드라마틱한 노래에 담긴 현실 극복의 정신을 시로써 재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이다.
1991년, 43세를 일기로 작고한 고정희는 생전에 『초혼제』(창작과비평사, 1983)와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창작과비평사, 1989)란 두 권의 장시집을 낸 바 있다. 이에 앞서 낸 『실락원 기행』(인문당, 1981)에는 문제적 장시 <還人祭>가 실려 있다. <還人祭>와 두 장시집은 굿과 시의 결합 가능성을 탐색한 소중한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논의도 가치 평가도 거의 되어오지 않았다. 시인의 작업은 70년대 탈춤부흥운동에 이어 80년대에 마당극이 마당굿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민중 문화의 원형질을 탐구하고 서사적 구조에 의거해 시대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겠다는 의도로 행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 정신적 뿌리는 2천 년 동안 갖은 외래종교의 위세와 일제의 탄압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굿판에 닿아 있다.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계에서는 무당을 사탄에 버금갈 정도로 혐오스런 존재로, 무속을 광기에 찬 악의 세계로 취급하기도 한다. 진보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교계에서도 무속을 종종 미신으로 취급하는데 기독교인이었던 고정희가 굿을 자신의 시세계로 왜 끌어들였을까 하는 의문은 마땅히 제기되었어야 함에도 제기된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기독교와 무속은 죽음관이 판이하므로 기독교인이 자신의 시 속에 무속의 죽음관을 어떻게 수용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충분히 해명되었어야 했다. 아울러 기독교인 고정희가 굿과 시의 결합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올바르게 평가해야 할 필요도 있기에 이 한 편의 글은 씌어진다.
2. <還人祭>ㅡ흥겨운 놀이판의 재현
생전에 10권의 시집을 낸 바 있는 고정희의 제3시집 『초혼제』와 제7시집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는 장시집이라는 형식상의 특색과 굿의 현대적 의미를 탐색했다는 내용상의 특징 이외에, 한 가지 중대한 문제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의 다른 시집에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완연한데 유독 두 시집에서는 무속에 대해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무속세계에 대한 관심은 <실락원 기행>에 이미 예비되어 있던 것이기도 했다. 시인이 생애 내내 기독교인이었음은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이력과 그녀의 다른 시집들, 또 많은 산문(한 가지만 예를 든다. 고정희는 <민중과 시>라는 평문에서 “모든 참된 문학작품은 그 속에 무엇인가 기독교적인 것을 담고 있고 또 참된 기독교는 무엇인가 시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대로 역사상 인류가 가진 모든 고전 속에는 성서가 증언하는 진리가 부분적으로 육화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성서와 문학은 둘 다 그 중심이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인간을 위한 구원'에 관심한다는 데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김우규 편저, 『기독교와 문학』, 종로서적, 1992, 446쪽)에서도 확인되고 있는데 왜 제3시집에 이르러 죽음관이 판이하게 다른 무속에다 자신의 시세계를 접목시켜야 했던 것일까. 처녀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배제서관)의 시편부터 살펴보면서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본다.
잠든 메시아의 봉창이 닫히고
대지는 흰 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작은 길 하나까지 묻어버릴 때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 사람아.
ㅡ<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부분
표제시 외에도 “바벨탑에 가위눌린 푸른 신경 하나”(<바벨탑과 마을>), “하나님 부를 때/ 누가 말했는가”(<결빙기>), “에덴은 여전히 불꽃에 싸이고”(<살풀이>), “순례자의 크고 환한 웃음소리”(<내설악 연가>), “종말 때문에 울부짖는 내 머리칼 뒤”(<파블로 카잘스에게>), “조금만 더 가면 천국으로 들어가요”(<迷宮의 봄 6>) 등 시집은 기독교인이 쓴 것임이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시를 한두 편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죽음에 대한 생각이 기독교의 죽음관과 일치하고 있다.
살지만 실상은 죽어 있는 나 곁에
죽었지만 실상은 살아 있는 자,
형벌의 수액은 이미
우리 뿌리 곁에 있다
ㅡ<아우슈비츠 2> 부분
신약성경에서 죽음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이해되므로 죽음은 죄의 값이다. 인간은 죽어 은혜로운 생명의 주 하나님 앞에 인도되기 때문에 생명이 무화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보존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된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의 죽음관이다(김경재, <영생을 향한 삶의 방식>,『죽음이란 무엇인가』, 한국종교학회 편, 도서출판 창, 1990, 220쪽). 고정희는 죽음을 늘 예비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살지만 실상은 죽어 있는 자”로 보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아우슈비츠의 유태인을 “죽었지만 실상은 살아 있는 자"라며 부활시키고 있다. 고정희에게 있어 죽음과 삶 사이에 흐르는 강의 의미는 같은 시의 "하나님 버린 목숨”과 “하나님 밖에 산다 버린 것들 속에/ 이미 버림받음이 있다”에 잘 나타나 있다. 살아 있더라도 하나님을 버린 목숨은 이미 죽은 목숨이며, 하나님 밖에 사는 목숨은 이미 버림받은 목숨이다.
이렇듯 기독교인의 죽음관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던 시인의 죽음관은 제2시집 {실락원 기행}에 이르러 변모한다. 고정희는 스스로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극히 인간 중심적인 종교인 무속의 죽음관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목만 일별하더라도 이 시집에는 <예수 前上書 1> <예수 前上書 2> <유랑하는 이브의 노래> <도마 福音>과 함께 ‘진양조’ ‘중중몰이’ ‘자진휘몰이’ ‘휘몰이’ ‘단몰이’를 부제로 한 <新연가> 연작과 <베틀 노래> <풀무질 노래> <보부상 노래>가 공존한다. 판소리와 민요를 비롯한 전통문화에 대한 재조명 작업은 마침내 ‘저승의 잡귀’와 ‘司祭의 축복’을 한 시 속에 등장시킨다. 하지만 전통문화에 대한 재조명이 전통 율격의 시적 수용에까지는 나아가지 않은 상태이다.
화계사 북소리
저승 문 두드리는 밤 일곱 시
(저승의 잡귀들도 사슬을 푼다는 밤 일곱 시)
잠시 마음에 채인 족쇄를 풀며
그대여 아무도 모르게 내가 운다
아무도 모르게 그대 우는 소리 듣는다
…(중략)…
한때 우리들의 피를 부풀린
司祭의 축복과 종소리 다 어디로 가고
…(중략)…
떠도는 원귀들도 잠재우고 싶구나
ㅡ<失樂園 기행 3> 부분
기독교 세계에서 잡귀니 원귀 따위가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런데 고정희는 낙원을 읽어버렸다는 전제하에 잡귀며 원귀를 시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무속은 불행한 죽음에 대한 원한을 풀어주는 데 집중하는 민간신앙인데, 바로 이 점을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속에서는 죽음을 현실로 일단 받아들이지만 죽음 자체는 불행한 것으로 여기고, 산 자의 노력에 의해 죽은 자는 신격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시인은 이 땅의 모든 억울한 주검들이 예수처럼 부활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떠도는 원귀들도 잠재우고 싶”어 한마당 굿판을 벌일 마음을 먹는다. 이 시집의 제10부는 장시 <還人祭>이고, 이 장시는 제3시집의 제4부로 다시 가감 없이 게재된다. 시인 나름대로 의욕을 가지고 한 작업이고, 제3시집은 장시들로만 이루어져 있기에 전재해도 별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還人祭>는 불림소리, 조왕굿, 푸닥거리, 三神祭, 還人祭의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연을 예상하고 쓴 시인지라 각 마당의 서두에 무당이며 귀신, 탈꾼의 행위 내용, 그렇지 않으면 무대 상황을 설명해놓고 있다. 이중 첫 마당 불림소리는 무당이 굿을 시작할 때 흔히 하는 부정거리를 염두에 두고 쓴 시로 별 내용이 없다. 그러나 두 마당 조왕굿부터는 주목을 요한다. 조왕은 부엌을 관장하는 가신으로 가내의 모든 일을 정탐한다고 믿어져온 신이다. 시인은 귀하게 태어난 남성들이 이 사회를 억압과 지배가 상존하는 곳으로 만들지 말기를, 무당, 즉 여성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소망한다.
우리들이야 어차피 깨달음 더디고
뭇매 맞아도 아픈 줄 모르오니
으짜든지 우리 귀남자 자손
청맹과니 되지 않게 비나이다
귀머거리 되지 않게 비나이다
벙어리 되지 않게 비나이다
놀고먹지 아니하게 비나이다
등쳐먹고 살지 않게 비나이다
간 내먹고 살지 않게 비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들’은 깨달음 더디고 뭇매 맞아도 아픈 줄 모르는 ‘여성’이다. 그런데 귀남자 자손, 즉 뭇 남성은 청맹과니,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기 십상인데도 그들 중 다수는 여성을 “등쳐먹고”, “간 내먹고” 산다. 무당은 유교적인 가부장제 아래서 성차별을 당해온 이 땅의 여성을 대표하고 있고, 그래서 그녀의 사설은 성의 평등에 집중되어 있다. 무당은 제정이 분리된 이후 끊임없이 신분의 하락을 감내해온 계급상의 최하층민이었기에 무당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해방되어야 할 존재이다. 시인이 굿 절차나 무가의 사설보다 무당에 관심을 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 마당 푸닥거리에서는 온갖 귀신과 도깨비며 탈들을 다 불러내는데, 이들을 통해 시인은 “원 없이 먹어보자”는 민중의 꿈을 드러낸다. 또한 더불어 잘살자는 치국평천 혹은 태평천국에의 꿈은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많이 다르다. 죽음의 강을 건너 생자와 망자가 만나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고정희는 굿이라는 배에 이렇게 처음으로 동승한다. “탈탈 탈탈탈 탈탈 탈탈탈/ 봐탈 보탈 강탈 약탈/ 봉산탈 양주탈 무당탈 도깨비탈/ 입맞추고 넋맞추어 수신제가하여 보자” 같은 대목의 어수선함은 네 마당 三神祭에 가서도 무가라는 형식에 의존하고 있을 뿐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지만,
신 내린다 신 내린다
三神님 내리신다
땅 위에 멍석 깔고 하늘에 넋을 풀어
우리 神 오신 길에 還人祭를 올려라
백옥 같은 얼굴에 八字 눈썹 세우시고
백두산 코 해 같은 눈
천신님 내리신다 어흠
과 같이 음악적 가락에 대한 배려는 확실하다. 이런 대목에는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신명이 실려 있다. 특히 2음보, 3음보가 중첩되는 우리 가락이 살아나 있어 읽는 동안 흥이 난다. “창 받아라! 훠이 훠이/ 창 받아라 창 받아라 창 받아라/ 꽥 꽥”이나 “썩 썩 물러가라 둥둥”, “허허 공중 잿더미로 날게 하리라/ 둥둥둥……” 같은 무당의 부르짖음에도 일정한 가락이 있어 흥겨운 놀이판을 재현한다. 의성어와 의태어를 적절히 이용한 가락으로 무당과 청중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며, 시인과 독자와의 거리도 좁혀진다. ‘다섯 마당 還人祭’에서는 흰 옷 입은 당골네가 등장해 온갖 차별과 설음을 견뎌온 한 여성의 이력을 들려준다. 장시 <還人祭>의 대미는 다음과 같은 모성에 대한 예찬으로 장식된다.
저승 극락세계라도 이승만 못해
몇 굽이 돌아오는 추위에 기대어
빈 자리 적막에 기대어
사시나무 떨 듯 기다리는 어미
갸륵해라 갸륵해라 갸륵해라
다만 사람 하나 간절한 방
떠난 그대 수의 殮衣를
마름질하는 손
어미가 기다리는 것은 떠난 그대이다. 어미는 남성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 사별한 여인이기에 “떠난 그대 殮衣를/ 마름질”하고 있다. 긴 시의 마지막 연에 가서야 제목이 왜 ‘還人祭’로 붙여졌는가에 대한 설명이 나온 셈이다. 여인이 무당을 앞세워 굿을 벌인 이유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세계로 가버린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생전 여인의 등을 쳐 먹고 간을 내 먹은 존재이지만 지금은 저승에 가고 없다. 저승이란 데가 제아무리 극락세계일지라도 이승만은 못한데, 임이 지금은 이승을 떠나고 없기에 무당을 불러 굿을 한 것이다. “저승 극락세계라도 이승만 못해”라는 구절은 고정희의 <還人祭>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열쇠이다. 죽음이 영생에의 문을 여는 순간이며 심판과 구원이 완성되는 엄숙한 순간임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죽음관을 믿고 있었을 시인은, 한 갸륵한 어미를 그려내기 위해 무속의 죽음관을 적어도 자신의 시에서는 이런 식으로 수용한다. 이 땅의 민중이 두려워한 것은 억울하게 죽어 이승과 저승 사이의 강을 떠도는 존재였기에 무당을 앞세워 죽은 자를 보다 완전히 죽이는 데 주력해왔고, 그 과정이 곧 굿이었다. 사후세계가 설사 극락일지라도 우리가 중시해야 할 곳은 저승이 아니라 이승이라는 생각, 그것은 바로 민중의 생각이었다. 어미가 떠나간 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염의를 마름질하고 굿을 하는 것일 뿐, 그녀는 다시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 맺힌 한도 풀고, 이왕이면 건강하고 잘살아야 한다. 고정희가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꾀한 <還人祭>는 이처럼 기독교인의 세계관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며, 특히 죽음관에 있어서의 차이는 대단히 크다.
기독교도 무속도 죽음이 종말이 아니라고 단정짓고 있지만 무속의 죽음관은 기독교의 죽음관과는 달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과 자유에 이르는 것”(로마서 8:21)이라는 인식이 없다. 부활과 영생사상이 없는 대신 한사코 거부하고픈 사후세계로 나날이 다가가는 우리네 삶을 긍정하는 데서 무속적 죽음의 인식은 출발한다. 그 인식은 삶이 배태한 환멸과 정말에의 터득으로 성숙하고, 마침내는 삶과 죽음을 굿이라는 한마당 놀이로써 한 아름에 끌어안는다. 즉, 무속의 죽음관은 삶을 투시하여 생로병사의 비밀을 풀어보려는 것이며, 죽음을 삶 가운데의 엄연한 현실로 범주화하려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영존하는 하나님이 피조물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는 구원의 순간이라는 기독교의 죽음관과는 완전히 달랐음에도 고정희는 무속의 죽음관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부정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더욱 확신을 갖고서 굿의 세계를 확대해보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 장시집 『초혼제』가 탄생한다.
3. 『초혼제』ㅡ난장판의 신명과 풀이
『초혼제』는 총 5부로 이루어진 장시집이다. 이중 1∼3부는 전체적으로 기독교인이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제1부 <우리들의 殉葬>은 기독교계의 영결례 과정, 제2부 <化肉祭別詞>는 신학생이 고난주간에 올리는 기도, 제3부 <그 가을 추도회>는 추도식과 추도사의 외양을 빌어와 하나의 온전한 문학작품으로서는 그 형식에서부터 미흡한 바가 있다.
키리에, 키리에, 키리에
이땅에 당신의 자비가 임하옵시며
이땅에 당신의 자유가 임하옵시며
이땅에 당신의 해방이 임하옵시며
이땅에 당신의 용서가 임하옵시며
(오, 주님 아니올시다)
이땅에 당신의 징벌이 임하옵시며
이땅에 당신의 심판이 임하옵시며
이땅에 당신의 분노가 임하옵시며
이땅에 당신의 저주가 임하옵시며
(오, 그러나 그러나 주님 어찌 하리까)
ㅡ<化肉祭別詞> 부분
우리는 서로 무너졌나이다
비겁하게 비겁하게 무너졌나이다
신낭만주의를 앞세우며 무너졌나이다
신구호주의를 앞세우며 무너졌나이다
…(중략)…
신상상주의 신서정주의 신비평주의 신구조주의를 앞세우며
무너지고 무너지고 무너졌나이다
ㅡ<그 가을의 추도회> 부분
이처럼 계속 되풀이되는 기도문 형식은 읽기에도 지루할 뿐 아니라 주제의 약화와 시적 감동의 약화를 동시에 가져온다. 80년대 초반기까지 노출된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문제점들에 대한 폭넓은 진단과 엄정한 비판이 행해지고 있지만, 반복과 나열에서 오는 긴장감 부재는 시인의 확고한 비판의식에도 불구하고 형식과 내용 양면 모두에서 실패를 노정하고 있다.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판이하게 다른 기독교와 민간신앙을 혼용한 것도 실패의 이유가 된다. <그 가을의 추도회>의 제3장 추도시에 “다음은 고인의 혼을 기리는 유족 대표께서/ 애통하고 절통한 마음 함께 나누고자/ 추도시를 봉헌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밤 부활이라 꿈꾸자” 등의 구절이 보여 기독교 색채를 띠고 있는 데 반해 제4장 추도사에는 “구천 황천 북망산에 고이 계신 우리 임”, “지하 명부전 어머님께서도/ 제주 봉헌 흡흡히 흠향하시고/ 얼기설기 내리소서” 등의 구절이 있어 무속의 죽음관을 보여주는 식이다. 이와 아울러 지나치게 폭넓은 사회 진단에서 오는 공허함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예시한 <그 가을의 추도회>의 제5장 초혼제만 보더라도 의미도 분명하지 않은 신낭만주의에서 시작된 ‘신∼주의’는 신구조주의까지 12회나 나오며, ‘∼통일 기원축수’는 5회 ‘∼제 폐지 기원축수’는 6회 ‘∼통일’은 4회, ‘∼폐지’는 10여 회나 나와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다루어지는 내용도 출애급의 광야에서부터 지하 명부전 우리 임네에 이르기까지, 각설이로 떠도는 전봉준에서부터 외제 선호사상 폐지에 이르기까지 동서와 고금을 아우르고 있어 다채롭기는 하나 통일성이 전혀 없다. 하지만 제4부 <還人祭>와 제5부 <사람 돌아오는 난장판>은 무속과의 만남을 꾀함으로써 일단 형식과 내용의 통일을 이룩한다. 민중의 아픔을 위무하고자 쓴 시가 민중의 생활상을 전혀 담지하지 못한데서 온 실패를 극복하고자 고정희는 민중이 수세기를 향유해온 굿에 마당극을 결합시킨 마당굿의 형식에다 자신의 시를 의지(依支)하고자 한 것이다.
‘마당굿을 위한 長詩’라고 제목 위에 쓴 <사람 돌아오는 난장판>은 총 49쪽에 달하는, 70∼80년대 소극장과 대학가에서 행해진 마당굿과 동렬에 놓이는 작품이다. <함평고구마> <돼지꿈> <장산곶매> <녹두꽃> 등 연희본은 마당굿을 위한 대본인데 <사람 돌아오는 난장판>은 시가 강조되고, 특히 마당극의 재담과 판소리의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것이 연희본과 다른 요소이다. 총 세 마당으로 이루어진 시는 각 마당마다 4, 4, 3과장의 춤을 춘 후에 시작하라고 명시하고 있어 공연을 염두에 두고 썼음이 틀림없다. ‘사람 돌아오는 난장판’은 도깨비들이 나와 잔치를 벌이며 재담을 하는 장면, 무당과 박수가 나와 굿판을 벌이는 장면, 상여꾼들이 상여소리를 부르는 장면, 남정네가 나와 판소리를 하는 장면 등을 통칭하여 난장판을 벌인다는 뜻에서 붙여진 제목이다. 여느 마당극은 일정한 줄거리가 있으나 이 작품은 난장판처럼 어떤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등장인물들이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이야기하고 노래한다. 고정희는 왜 이 작품에서 극의 형식을 마다하고 굿을 도입한 것일까.
임진택은 <마당극에서 마당굿>(1982)에서 극에서 굿으로 옮아간 당위성을 설명한 바 있다. 목소리만 높고 다양성과 철학적 깊이가 부족하다는 비판에 직면한 70년대의 마당극을 극복하면서, “일상적인 생활과 놀이를 공유화하여 사람을 집합화하는 총체적인 예술운동이며 문화운동이며 사회운동으로서의 마당굿을 하게 되었다”(채희완/임직택, <마당극에서 마당굿으로>(『한국문학의 현단계Ⅰ』, 김윤수 외 편, 창작과비평사, 1982, 204쪽)는 그의 설명은 고정희의 <사람 돌아오는 난장판>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안내문이 된다. 각 거리마다 색다르게 놀고 색다르게 소리 지를 수 있으며, 의례와 유희의 경계가 모호한 굿의 특징은 이 작품에 어지러운 난장의 성격을 부여한다. 판은 흥청망청 정신없이 돌아가지만, 그렇다고 의사 표현이 없지는 않다. 시인은 둘째 마당 중간 부분에 이르러 무당의 입을 빌어 농민과 도시근로자의 가혹한 생활상을 증언하고, 그들을 착취하는 ‘인충’을 고발한다.
무 당: 물러가라 물러가라 농촌귀신 물러가라
일년 사시절 피땀으로 절은 농사
반절은 인충이 먹고 반절은 수마가 먹고
비료세 소득세 저기세 라디오 티뷔세 물고 나면
가을 수확은 검불뿐이니 사―람―이 죽었구나
…(중략)…
무 당: 물러가라 물러가라 도시귀신 물러가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식은 밥 한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십리 공장 길 걸어 지하 3층으로 내려가
한여름 같은 기계실에 혼 빼주고 넋 빼주고
마음도 다 빼주니
한 달 수입이 3만 5천 원이라
무당은 망자의 혼을 불러와 생자의 한을 풀어주고 미래의 복을 빌어 주는 제사장의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다. 농촌귀신 도시귀신 물러가라고 소리치며 사회악을 쫓는 혁명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외침 속에는 청중, 즉 독자의 신명을 불러일으키는 해학의 정신이 들어 있다. 농민의 가을 수확은 검불뿐이고 도시근로자 한 달 수입은 결국 빈주먹밖에 남는 것이 없다는 불평을 듣고 있노라면 이 굿청이 성스러운 의례를 행하는 곳이 아니라 억눌린 욕구를 터뜨리며 해방감을 만끽하는 ‘풀이’의 장소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오늘날 많이 위축되고 변질되어 있는 굿의 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굿이 생활과 동떨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생활하면서, 생활 가운데에 믿었던 민간신앙이었다고 고정희는 무당의 입을 빌어 설명했던 것이다. 무당은 이런 사설도 한다.
무 당: 내 뜻이 네 뜻이고 네 뜻 또한 내 뜻이니
살풀이 고풀이 원풀이 한풀이도 끝났으니
내일이면 이 고을에 사람이 올 것이오
사람 오는 굿판에 시나 한 수 지어 읊고
동구밖에 지등 달아 사람잔치 벌입시다
박 수: (고개를 끄덕이며 시를 읊는다.)
하늘에는 천황씨가 있고
땅에는 지황씨가 있네
동서남북 다리 위에
달도 밝은 밤
무당할멈 시 박수할아범 시
섞어서 환영하네
그 나머지 부귀공명은
내가 알 바 아니구나
굿을 끝낸 뒤에 하는 뒤풀이는 사람 잔치이다. 이놈 욕하고 저놈 칭찬한 도깨비 잔치도, 이놈 불러내고 저놈 보내버린 굿도 이제 다 끝났으니 시나 한 수 지어 읊고 동구 밖에 지등 달아 사람 불러 모아 잔치나 벌이자고 한다. 굿이 궁극에는 귀신을 위한 잔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잔치임을 암시한 대목이다. ‘사람 돌아오는 난장판’은 이래서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굿청에 진설한 온갖 음식도 사람들이 먹을 음식이요,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도 사람들이 온갖 시름 다 잊고 삶의 질곡에서 해방되자고 하는 짓이 아니냐고 무당이 말하자 박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를 읊는다. 하늘에는 천황씨가 있고 땅에는 지황씨가 있다고. 그 나머지(시를 제외한 나머지) 부귀공명은 내 알 바 아니라고. 이 대목에 나오는 천황씨나 지황씨는 중국 전설상의 임금이 아니라 천지신명 정도의 뜻으로 쓰였다. 신이라면 복을 주기나 하지 산 사람을 해코지하지 말라는 뜻에서 쓴 구절이다. 죽음의 강을 건너기 위한 항진으로서의 굿의 의미는 이제 새로운 내일을 열기 위한 통과의례로서의 굿으로 확산된다. 무당과 박수는 함께 노래 부른다. “인간 세상의 더러움/ 다 함께 깨끗해지고/ 온 세상 울퉁불퉁한 것/ 모두 변하여 고르게 되었네”라고. 즉 이것은 이승에서의 모든 고통은 불평등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모두들 변하여 고르게 되자고, 평등이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한 시인의 의도를 담은 노래이다. 여기에는 이판 저판 난장판을 만들고 있는 여러 족속들의 삶의 모습을 인정해주는 자리라면 억울한 농민도 불쌍한 도시근로자도 없을 것이라는 항변도 담겨 있다. 셋째마당에서는 판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어수선해진다. 육자배기와 판소리와 굿의 사설이 동원되고, 다음과 같은 소리꾼의 민요 가락도 나온다.
소리꾼: (남정네 춤에 맞춰)
빙빙 돌아보세 방방 뛰어보세
우리 임 돌아오니 아니 노지 못하리라
동동주 여기 있소 어야디야
설기떡 여기 있소 어야디야
인삼주 여기 있소 어야디야
사랑떡 여기 있소 어야디야
소리판뿐만 아니라 굿판에서도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과 노는 것이다. 망자의 극락천도를 위해서는 빙빙 돌고 방방 뛰어서라도 신들을 즐겁게 해야 한다. 그럴 때 굿판에 내려온 신은 준엄한 판관의 탈을 벗어 던지고 인간 사이에서 유쾌하기 이를 데 없다. 신도 감정은 인간과 같아, 놀아주어야 흥겹게 생자의 삶을 축복해준다. 그래서 신의 구실을 하는 무당은 혼신의 힘을 다해 땀 흘리며 춤추고, 울며 노래하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때로는 황홀경에 사로잡혀, 때로는 망아의 경지에서. 소리꾼의 말을 받아 남정네는 “저승극락 버리고 돌아왔으니/ 에따 행화가 천냥이로다”라고 노래한다. 그렇다. 저승이 어찌 극락이란 말인가. 시인이 표현하고픈 극락은 이 시의 말미인 남정네의 노래에 담겨있다. “붉은 꽃은 만 송이/ 푸른 잎은 즈믄 줄기/ 첫 번째 봄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가?/ 노래와 춤 삼현 소리 일제히 그치니/ 동녘에 붉은 해/ 새로 뜨는 시간이로구나”라는 남정네의 아름다운 노래는 날마다 맞이하지만 늘 새로운 이승의 아침이 바로 극락이라는 뜻으로,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려는 시인에게 어느덧 예언자의 풍모를 실어준다. 고정희는 몇 권의 시집을 낸 뒤 다시 한번 굿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4.『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ㅡ여성해방을 위한 힘찬 노래
시인은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후기에서 “잘못된 역사의 회개와 화해에 이르는 큰 씻김굿이 이 시집의 주제”라고 하였다. 발문을 쓴 박혜경은 이 시집이 굿판의 사설조 가락을 기본 리듬으로 삼고 있다고 했으며, 시집 뒤표지에서 김혜순은 ‘터닦기 노래굿’이라고 시집의 전체적인 성격을 규정지었다. 자타가 이 시집의 시적 외양은 굿이라고 규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시집이 씻김굿 사설의 형식과 시를 적절히 결합시킨 한 권의 굿 시집일까.
거두소서 거두소서
칼날을 거두소서
금남로에 흩어진 넋
칼날을 거두소서
충장로에 흩어진 넋
칼날을 거두소서
ㅡ<넋이여 망월동에 잠든 넋이여> 부분
에헤야 노적이야
어기영차 노적이야
경상도 이노적 이 집으로 들여오소
전라도 싸노적 이 집으로 들여오소
이 논 저 밭 솟은 노적 이 집으로 들여오소
담울담울 쌓인 노적
우뚝우뚝 치뜬 노적
에헤루 노적이야
어기영차 노적이야
ㅡ<집치레 번듯하니 민주집이 분명하다> 부분
전자는 기도의 형식이며, 후자는 민요조이다. 시집 전체를 보아도 굿판의 사설조 가락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일곱 거리의 무가와 뒤풀이로 이루어진 한 판 씻김굿으로 읽자면 결국 시에 담긴 정신이 굿과 얼마나 근접해 있는가를 살펴볼 도리밖에 없다. 씻김굿의 목적은 망자의 극락 천도에 있다. 망자를 극락에 들 수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영혼을 깨끗이 씻기는 의례인 씻김굿은 망자를 죽음의 세계로 보냄으로써 생자가 더욱 충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발복을 기원하는 굿이다. 그런데 시세계를 죽음관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무속의 세계보다는 불교의 세계에 보다 가까웠음이 드러난다. 형식에 있어서도 굿과는 거의 무관했으며, 내용도 무속세계와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시인이 구사하는 언어 중 무속세계의 것은 없는 대신 불교 언어는 자주 등장한다.
팔만사천 사바세계 생로병사(15쪽)
천상천하 남자독존 사생결단 살아낼 제(18쪽)
살아생전 백팔번뇌 즈려밟고 들어오신다(27쪽)
시왕길을 밝혀 가옵소사(36쪽)
일년 삼백육십오일 넘나드는 백팔번뇌 골짜기(42쪽)
사람이 여원무궁이고/ 극락이고(45쪽)
서방정토 극락까지 맑게 떴다(57쪽)
원왕생 원왕생 인도하사이다(65쪽)
제밥 먹고 약밥 먹고 염불 받아(88쪽)
극락세계 서방정토 훠이훠이 가옵소사(90쪽)
백팔 천지신명 마음속에 들어앉아(94쪽)
이처럼 시집 전체에 걸쳐 불가의 언어가 발견되고 있다. 가락도 무가와는 거리가 있으며, 죽음관마저 무속의 죽음관과 불교의 죽음관이 뒤섞여 있다. 이는 2천 년을 이어온 무속의 역사 속에 불교의 의례가 상당히 삼투되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죽음은 생사의 단절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위한 예비 단계이다. 내 생명을 연기(緣起)로 하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명의 연속과 순환이 윤회인즉, 불가에서 죽음의 세계는 가면 그만인 저승이 아니다. 문 밖이 북망이라는 말 그대로 우리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죽음이지만, 나는 거듭 다시 살아날 수 있어 우주적 생명과 동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도 부처 중심의 종교가 아니라 무속 이상으로 인간 중심적인 종교이다. 인용한 몇 행만 보아도 유추가 가능한 이 시집의 대주제는 거칠게 정리해 다음과 같다.
인간인 이상 팔만사천 사바세계에서 생로병사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인데 천상천하 남자독존이로구나, 그리하여 일년 삼백육십오 일 여성들이 넘나들게 된 백팔번뇌의 골짜기를 어찌하랴, 부처는 부디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으로 원왕생 원왕생 우리를 인도하여주소서, 그곳이야말로 극락세계 서방정토가 아니겠는가.
페미니즘에 입각, 천상천하 남자만 독존하지 않은 세계가 도래하기를 시인은 이렇게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시인이 씻김굿의 형식을 빌려 시를 쓰면서 정작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해명해야 할까. 불교는 스스로의 공력으로 부처가 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고, 특히 고래로 여인네들이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많이 믿어온 종교이다. 시인은 종교로서의 불교보다는 여성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극락세계 서방정토에의 꿈을 담고 있는 평등의 세계관에 매료되었다고 본다. 무속에 한동안 관심을 두었던 것도 무속이 여성해방의 염원을 담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남녀의 차별이 엄존하는 유교적 가부장제의 사회에서 굿은 주로 여성이 주관하여 행해온 것이다. 고정희는 굿이 여성의 억눌린 감정을 달래주는 기능을 했다는 바로 그 점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시인은 이 시집에서 애초에 마음먹은 대로 씻김굿의 형식을 차용하지 못했고, 씻김굿의 정신도 온전히 수용하지는 못했다. 단지 단군 이래 이 땅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무수히 많은 이들의 혼을 달래주기 위하여 저승의 기슭으로 나아가는 배의 갑판에서 서툰 대로 굿을 벌이기로 했던 것이다.
불교의 사상과 의례를 대폭 받아들인 우리 전통 무속의 무덤 위에 핀 푸른 잔디는 바로 어머니들이다. 저 무덤 위에 다시 피어나야 할 민중은 누대로 자기희생으로만 일관해온 이 땅의 어머니들이다. 어머니는 “이역만리 공출당한 고려 어머니”이며, “약지 잘라 혈서 쓰던 독립군 어머니”이며, “일제치하 정신대 우리 어머니”이며, “부역 나가 처형당한 우리 어머니”이며 “일사후퇴 때 죽은 어머니”이며,
자유당 부정에 죽은 우리 어머니
민주당 부패에 죽은 우리 어머니
삼일오 약탈선거 때 죽은 우리 어머니
사일구혁명 때 죽은 우리 어머니
오일륙 쿠데타 때 죽은 우리 어머니
한일협정 반대 데모 때 죽은 우리 어머니
부마사태 때 죽은 우리 어머니
옥바라지 화병에 죽은 우리 어머니 아니신가
넋이야 넋이로다
이 넋이 뉘신고 하니
광주민주항쟁 때 죽은 우리 어머니 아니신가
애기 낳다 칼맞은 우리 어머니
이다. 이 땅의 어머니는 고려 때도 이역만리로 끌려갔었는데 국권이 일제에 빼앗기자 정신대로 또 끌려갔었고, 독재자가 부정을 일삼고 군인이 국가를 통치하는 과정에서도 최대의 희생양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1980년 5월의 광주에서는 죽기도 하고 남편이나 자식과 사별하기도 한다. 어머니의 억울한 주검이 없는 세상, 어머니의 통곡이 들려오지 않는 세상, 어머니가 아버지와 동격으로 대접받는 세상이 곧 ‘해방 강토’이며 서방정토 극락이다. 시인은 넷째 거리에서 망월동에 잠든 넋들을 위무하는 노래를 부르고, 일곱째 거리에 이르러 휴전선 철조망 너머 반도의 북쪽을 쳐다보며 통일의 노래를 힘차게 부른다. 여성해방에 이어 군사정권 타도와 분단의식의 극복에까지 그 진폭을 넓혀가는 시집은 ‘통일 산천’과 ‘해동 조선’의 아름다운 정경을 상상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모든 질곡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확신으로 시집 전편에 넘쳐나는 힘이 느껴진다. 그런데 시에 담긴 정신은 굿과 분명 일정한 거리가 있다. 앞서 지적한 형식의 불일치와 죽음관의 불통일 외에도 놀이의 정신이 빠져 있기 때문에 “큰 씻김굿이 이 시집의 주제”라는 시인의 말과 다른 이들의 언급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무당은 자신의 몸을 매개체로 하여 청중에게 공수를 주고, 청중은 공수를 받고 망자와 화해한다. 화해의 자리는 결코 엄숙하지 않다. 무악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을 춤으로써만이 빙의(憑依) 상태에서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노래와 춤으로써 신에 접근하고 신이 되는 과정인 굿은 제의의 자리인 동시에 놀이의 마당이다. 제 명에 못 죽어 억울한 망자와 해준 것 없어 한스런 생자가 만나 대화하고, 영계의 신과 육계의 인간이 만나 화응한다. 씻김굿과 마당극의 놀이정신이 빠진 자리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돋아
하늘도 파랗고
들도 산도 파란 오월에
일천간장 각뜨는 수백 수천 무덤 앞에
아들 제상 차려놓고 어머니 웁네다
딸 제상 차려놓고 어머니 웁네다
…(중략)…
아제, 한잔합시다…… 음복하는 어머니
날 잡아잡숴, 주저앉아 웁네다
이 시집에는 이렇듯 눈물은 넘쳐나되 흥겨움은 없다. 황홀경과 망아는 모든 청중의 몸에 실려 희로애락이 담긴, 한바탕 어우러진 춤이 되고 한마당 휘어지는 노래가 되는데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는 이전의 <還人祭>와 <사람 돌아오는 난장판>에 비해 노래의 요소가 박약하다. 박혜경도 지적한 것인데, ‘∼습니다’나 ‘∼와’ 등이 어미로 끝나는 문어체적 구문들이 많아 씻김굿의 분위기는 맛보기 어렵다.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우리 어머니 아니신가’가 나오는 시는 셋째거리―해원마당 <지리산에 누운 어머니 구월산에 잠든 어머니>의 두 번째 시이다. 5쪽이 채 안 되는 분량 속에 ‘우리 어머니 아니신가’는 12회, ‘우리 어머니’는 21회, ‘∼하는 어머니’는 13회가 나온다. 이런 식의 반복법은 시집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 지나치게 많은 반복은 지루한 정도를 넘어 시적 감동마저 약화시킨다. 여성이 해방되어야 인간이 해방되고, 어머니의 한이 풀려야 해방 세상이 온다는 시인의 의도가 때로는 지나치게 많이 노출되어 있어 감동이 약화되기도 한다.
굿이 신탁과 제의로서의 기능만 했더라면 2천 년을 내려와 오늘날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굿판에는 노래와 춤이, 장구와 징이, 음식과 술이, 먼 데 살던 친척과 친척보다 가까운 벗이 있었다. 그래서 굿판은 망자를 초청하는 죽음의 판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추임새를 연발하게 하고 어깨춤을 부추기는 멋진 살판이었다. 신명을 자신의 몸에 싣거나, 신바람이 난 사람과 혼연일체가 되어 풀어야 할 것들 다 풀어버리고 내일을 연 흥겨운 놀이판, 그것이 굿판의 모습이었다. 신과 한 자리에서 즐김으로써 인간은 신과의 종속 관계에서 평등 관계로 이행할 수가 있었다. 고정희는 굿의 의미를 청신-강신-영신-송신의 의미로 파악했지 영신과 송신 사이에 오신(娛神)이 들어 있으며, 이것이 굿 정신의 핵심임을 놓치고 있었다. 그래서 시인의 야심만만한 장시집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는 많은 장점과 아울러 수다한 허점을 갖는 시집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무가에 대한 더욱 깊은 연구와 굿 정신에 대한 천착이 있었더라면 이 시집은 한 시인의 대표 시집을 넘어 한 시대의 대표 시집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긴다.
5. 노래 부르며 죽음의 강을 건너다
이때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판소리와 민요 등 전통문화에 대한 재조명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씌어진 <還人祭>에서 고정희는 무속의 시적 수용을 과감히 수행한다. 이 작품에서 무가의 문학적 사설에 대한 연구는 부족해 보인다. 다만 무당이란 존재가 성차별을 감내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지켜온 신분상의 최하층민이란 점에 주목하였다. 성의 평등과 계급차별의 타파를 주장하고자 한 시인으로서는 자신이 기독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당을 시적 화자로 내세우고 싶었던 것이리라. 여성해방의 측면에서 무당이라는 존재는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還人祭>에는 굿판의 흥겨움이 그대로 살아 있고, 특히 사후세계보다는 이승에서의 삶을 중시한 점이 드러나 있다. 그런 의미에서 <還人祭>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있던 시인이 무속의 세계관을 긍정하기로 한 뜻 깊은 작품이다.
『초혼제』의 1∼3부는 기독교적 색채를 강하게 보여주지만 5부 <사람 돌아오는 난장판>은 마당굿의 형식을 도입해 굿 정신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다. 이 시에서 신은 인간의 소원과 현실적 욕구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협력자로서 기능하며, 신과 인간은 굿판에서 함께 신명이 난다. 그래서 굿판은 신성한 의례의 장이 아니라 억눌린 욕구를 터뜨리며 해방감을 만끽하는 풀이의 장소이다.
『초혼제』는 다섯 편의 장시로 이루어진 장시집이지만 이후 6년 만에 펴낸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는 보다 치밀한 기획 아래 씌워진 한 권의 장시집이다. 여성해방이 확대되어 군사정권의 정치적 억압도 사라지고 남북한 통일도 이루어져 서방정토가 저승이 아닌 이승이 되는 꿈을 노래한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는 해방에 대한 확신으로 힘이 넘쳐나는 작품이다. 하지만 노래의 요소의 약하고 시인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어 시적 감동은 이전의 작품에 비해 현저히 약화되고 만다. 이 작품 이후 시인의 굿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며, 시집 출간 2년 뒤에는 시인의 육신마저 지상에서 사라진다.
기독교인이었던 고정희가 죽음관이 판이하게 다른 무속을 자신의 시에 끌어들여 아름다운 합일을 이루려 했으니, 이는 실패가 일찌감치 예정되어 있는, 무모하고도 고된 작업이었다. <還人祭>와 <사람 돌아오는 난장판>에서 보여주었던 일정한 성취가 자신의 야심작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에 이르러 실패로 귀결되는 과정은 애당초 합일이 불가능한, 당연한 결과였다고 본다. 무가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거니와 굿정신과 유희정신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부족은 기독교 시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정희의 혼신을 다한 노력이 문학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기실 한국의 무속은 불교의 의례만 수용했던 것이 아니라 천주교, 기독교와도 일정 부분 친화를 시도하면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왔다. 그리고 쇠약해진 몸으로나마 지금도 죽음과 삶 사이를 흐르는 강에 무수히 많은 배를 띄우고 있다.
죽음에 대한 각기 다른 해답을 준비하고 있는 무속, 불교, 기독교가 삶을 바라보는 차원에서는 일치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음을 증명한 이가 바로 고정희이다. 무속을 자신의 시세계로 끌어들인 많지 않은 시인 가운데 고정희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는데, 시인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이유 때문에라도 그녀의 장시는 다시금 평가되어야 한다. 기독교 시인의 무속 수용이란 우리 시문학사상 초유의 일로, 결코 손쉬운 결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정희의 일련의 장시가 재평가되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신 중심적인 기독교의 죽음관을 신앙하는 상태에서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무속의 죽음관을 견지하는 아량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고정희는 장시를 통해 삶과 죽음을 한마당 굿판에서 껴안고, 기독교와 무속의 죽음관(때로는 불교의 죽음관까지)을 함께 수용하는 포용력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하여 긴 노래를 그렇게 목 놓아 부르며 죽음의 강을 건너가야 했던 것일까.
ㅡ이승하,『생명 옹호와 영원 회귀의 시학』, 새미, 1999, 233〜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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