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감자꽃 ―영월 동강가에서 /서상영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9. 2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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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꽃
―영월 동강가에서

서상영
 

어린애도 채간다는 부엉이 소리
멧새 모두 숨죽이는 밤
할아비는 평생 쌀 한 말 못 먹고 죽었다고
뗏목꾼인 아빈 곰 같은 어깰 들척이며
술주정으로 잠들었다

쿨쿨 코고는 소리는 도적처럼 울리고
감자 싫어 내뺐다는 어매는
원래 동강 뗏목꾼들이 우러렀다는 들병장수

방문 열고 사립문 밖 뛰쳐나오면
웬 놈에 감자꽃은 저리도 하얗나
굽어봐도 산 첩첩 산 넘으면 물 첩첩
아비는 잠에서도 드센 물결 소리 듣는가
꿈을 설치고 부엉이 울음 울고
아아 재째거리는 풀벌레처럼 난 사는구나

해지는 남쪽 길을 오도카니 쳐다보면
눈엔 누구처럼 화냥기가 백혔구나
이년아 저 강물 건너면 못 돌아온다
칡뿌리가 늙어 구렝이 될 때까지 감자꽃처럼 살그라
아비는 내 맘을 후려치며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소낙비 내리면 기운이 더 난다며
떼돈 벌러 뜀박질쳐 간 아비
된꼬까리서 돌아왔더라
평생 못 타본 가마 타고 사뿐사뿐 돌아왔더라
산맥 같은 어깬
소금토리가 물에 빠진 듯 싱겁게 풀어지고
감자꽃 진 자리 열매가 없다

갈라진 흙바람 벽에 부엉이 소리 스미고
강 안개 걷혀 해 들면 머릴 감았다
타향이 없으니 고향도 없고
감자꽃은 피고 지고
울음보다 외롬이 더 싫은 날엔

감자를 캔다
뭐라 내보이기도 수줍은 한 생을 캔다
꽃 진 자리 쭈그렁 열매도 없던 아비가
땅 아래서 살뜰히도 영글었다
하늘을 뿌리 삼아 가지 벌려 열렸다

 

 


『문학나무』(2002.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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