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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것들 1
―유리산누에나방의 방
송은숙
유리산누에나방 고치가 떡갈나무 잔가지에 매달려 있다
색을 거둔 나무 끝에서 펼쳐 보이는
연두의 둘레가 환하다
반짇고리에서 찾던 비단 골무 같다
골무 끝으로 기워낸 오리나무 어린잎 같다
먼먼 유리산엔 보광(寶光)의 동굴이 있어
석 달 열흘 긴 수련 끝에 굴을 헐고 나오는
어떤 존재를 기리는 고대의 전설
적막한 산에서 만난 시詩의 파편 같은 것
산은 어깨를 움츠린 채 설핏 잠이 들었고
산그늘에서 만난 손가락 두 마디 크기 고치는
매끄러운 유리알과도 같아
유리산의 유리를 가지고 놀기로 한다
투명한 유리, 알록달록한 유리, 차가운 유리, 날카로운 유리
햇살을 반사하는 유리, 뜬 구름 같은 유리
유리(琉璃)와 유리(瑠璃)를 가늠하고
유리(有利)와 유리(遊離)를 견주며
유리의 실을 친친 감아 스스로를 가두는
적막한 산에서 만난 유리산누에나방의 방, 같은
시의 안쪽에 거꾸로 매달려서
―시집 『만 개의 손을 흔든다』(파란시선,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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