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삐딱한 계절의 빨강 /김밝은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0. 25. 08:33
728x90

삐딱한 계절의 빨강

 

김밝은

 

 

올가을엔 동쪽에서 오는 사람을 꽉 잡어!

틀림없이 귀인일 테니…

 

나의 훗날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심술궂은 사월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초년고생은 심했구만

이젠 마음만 먹으면 다할 수 있겠어

(어딜 가든 똑같은 희망고문이지)

 

사과에 들여야 할 붉은 향기를 품기 위해

마음속 적심(摘心)은 쉽지 않아서 다만

아직 삐딱한 계절이 덮인 흙을 발로 꾹꾹 눌러주었다

 

빨강을 좀 더 주세요

아니, 그냥 빨강으로 나를 덮어줄래요

 

어둠처럼 고이는 잡념의 시간을 내 안에서 파내고

점괘에 맞추듯 붉은색을 들이부어야 하나

 

꼼꼼한 솜씨로 그려 넣은 부적의 붉은 샛길은

어디로 가닿는 절박한 소식인지

 

붉은 속옷을 입으라니까,

아브라카다브라!

 

 

ㅡ『서정과현실』(2021, 하반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