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산책 가잔 말 /황명자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2. 2. 23.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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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가잔 말

 

황명자

 


산책 가잔 말에는 어슬렁거림이 숨어 있다
목적지 없이 어슬렁어슬렁 걷다 보면,
꼭 정하고 나가는 게 아니라
길과 주변과 자분자분 얘기 나누게 된다
습관처럼 발길 멈추는 곳이 목적지가 되곤 한다
목적한 곳을 찾아 산책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곳이 없다면
사막을 걷는 거나 같을 테다
사막을 걷는 이들이 오아시스를 찾아다니듯
목마르게 갈구하지 않지만
아주 낯설지 않은 길을 걷는다는 건
이미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
결국 그곳에 다다르고 말 테니까
조금 걷다 보면 연못이 있지, 삼십 분쯤
가다 보면 강변이 나오지, 등의 말들을
알려 주는 사람은 무척 재미없다
산책 가잔 한마디 말고는
무작정 걷자고만 하는 사람에겐 묘한 끌림이 있다
다음 코스가 버스 종점이라고 알려주는 안내 방송보다
얼마나 더 가야 버스 종점일까, 궁금해하던 때가
그립다 그리워야 살맛 나는 것처럼
산책 시간을 애타게 기다리는 개처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해주는 사람과
늘 도사리게 되고 자꾸만 기다려지는
산책 가자는 말

 

―시집『당분간』(‘詩와에세이,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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