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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끝나고
나희덕
여행에서 돌아오자
미루어 둔 불행이 일제히 들이닥쳤다
벽장문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잡동사니들처럼
예외적인 날들은 끝났다고,
그것 보라고,
이게 바로 도망칠 수 없는 네 몫의 삶이라고,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앰뷸런스에 아버지를 태우고
응급실 가는 새벽,
비에 젖은 도로 위에는 점멸등이 깜박거리고
브론테 자매가 살았던 목사관에서처럼
음울한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폭풍의 언덕에서는
불우한 가족사가 그녀의 고장을 먹여 살리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나의 가족사가 깃발처럼 나부꼈다
남동생은 고속도로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점점 여위어 가는 어머니의 얼굴,
아버지가 몇 해째
응급실과 중환자실과 입원실과 집을 오가는 동안
폭풍은 우리를 막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더, 더, 막다른 곳으로
꿈에서 깨어난 듯 고통스러웠지만
그 고통을 미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신의 벽장 속에는
뜯지 않은 불행이 얼마나 더 남아 있는지
여행은 끝나고, 이제
쓰디쓴 풀과 거친 빵을 삼켜야 하는 시간
물을 긷고 또 길어야 하는 시간
구멍 뚫린 독에
끝없이 물을 부어야 했던 다나이드처럼
―『문예바다』(2021,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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