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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필적 고의에 의한 자살 또는 타살
이화은
꽃 속에 갇힌 채 죽은 벌을 두고
누구는
죽을 때까지 밥그릇에 코를 박아야 하는
노동의 비애를 한탄하더니
꽃의 치마폭에 싸인 채 숨을 거둔
카사노바의 정사를 부러워하는 로맨티스트도 있다
식후 잠시 오수에 들었다가
제 몸속에 손님이 든 줄도 모르고 몸을 닫아버린
꽃의 방심을 탓하는가 하면
이미 사주팔자에 생(生)과 사(死)가 다 정해져 있었던 거라는
운명론자도 있으니
노동과 로맨스와 사주팔자를 비껴갈 생이 있을까마는
나는 지금 모든 해석을 잠시 보류한다
비몽과 사몽 사이
달콤한 낮꿈의 끝자락에 코를 박고
노동과 운명과 사주팔자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꽃꿈아 제발 몸을 닫아라
–시집『절반의 입술』(파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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