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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나희덕
저에게 남은 것은
한쪽 다리와 세 마리 개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이 피켓을 세워두고 거리에 앉아 있다
사람들은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옆에 휠체어가 놓여 있고
종이박스를 펼쳐 만든 자리에는
어린 개들이 잠들어 있다
깨어 있을 때도 좀처럼 짖는 일이 없다
누군가 그 자리에 데려다주면 종일 앉아 있다가
밤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녀
그녀는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바라보다가
개들을 쓰다듬는다
신의 흔적이 있다면
남은 다리일까 사라진 다리일까
그녀에게 개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지진 후에도 몇 차례 여진이 지나갔지만
오늘은 모처럼 날씨가 화창하다
꽃 진 벚나무에는 잎이 돋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저에게 남은 것은
한쪽 다리와 세 마리 개밖에 없습니다
피켓을 읽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따금 뒤돌아보지만 누구도 손을 건네지 않는다
살갗이 벗겨진 사람처럼 앉아 있는 그녀를
세 마리 개들만이 지키고 있을 뿐
―『청색종이』(2021,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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