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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착
이주송
철퍼덕, 주저앉은
한 무더기의 소똥
이렇게 아름다운 안착이 있을까요
소의 근력으로 초록을 모두 탕진한
소용을 다 바치고 난 뒤의 표정
제가 가진 본성과 중력이
가장 평온한 모습으로 내려앉은
착지
모든 힘이 털렁 빠져나온 저 똥에는
초식의 감정과 순경順境이 있습니다
막 도착한 순하디순한 온기에는
풀 속에 밴 이슬도 살아 있어
김이 사리질 때까지 경건해집니다
자욱한 안개가 쟁기와 보습을 끌고
어기적어기적 새벽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산밭이 꺼벅거리며 축축한 등을 내밉니다
소는 거친 콧김을 내뿜다가
꼬리 흔들어 고요를 쫓습니다
주인은 워워 한 박자 쉬며
언덕 아래 풍경을 되새김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연꽃 송이 같은 소똥
좌선을 다 끝내고 나면
한 움큼의 풀씨 경전이 되겠지요
―시집『식물성 피』(걷는사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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