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초승밥
홍경나
사랑할아버지 저녁밥상에 남긴 밥
초승달을 닮아 초승밥입니다
진지를 자실 때면
흰 종지에 담긴 지렁부터 먼저 뜨던 사랑할아버지는
입맛이 없다시며 어흠어흠
늘상 밥을 남기십니다
사각반 위의 알찜이며 생치生雉적 북어보푸라기
맛난 반찬은 저분을 대는 둥 마는 둥
웁쌀 얹어 안친 뚜껑밥 아시푼
흰 입쌀밥을 너덧 술 남겨
꼭 체면을 하십니다
수저를 상에 내려놓고
보리숭늉으로 볼가심을 하고는
일찌감치 상을 물리십니다
사랑할아버지 진짓상은 이제 내 차집니다
밥물 넘어 들어간 호로록 알찜도
녹진녹진 구운 생치적도
포실포실 북어 보푸라기도
주발 맨 바닥 초승달같이 뜬 밝은 입쌀밥도 내 차집니다
시월 초이레는 사랑할아버지의 기일입니다
하늘귀엔 사랑할아버지가 밥상 물림 하던
입쌀밥 같은 초이레 달이 떴습니다
초승밥 : 경북 북부지방 양반가에선 어른이 밥을 남기는 것을 ‘체면한다’고 했는데, 남긴 밥이 초승달처럼 생겨 ‘초승밥’이라고 한다.
지렁 : 조선간장
웁쌀 : 솥 밑에 잡곡을 깔고 그 위에 조금 얹어 안치는 쌀
ㅡ시집 『초승밥』(현대시학사, 2022)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식물성 피 /이주송 (0) | 2022.11.02 |
---|---|
밥 /이삼현 (0) | 2022.11.02 |
가을들 /김령 (1) | 2022.10.29 |
돌멩이의 노래 /염혜순 (0) | 2022.10.27 |
악을 쓰며 짖는 개에게 /김명기 (0) | 2022.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