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기억
조헌주
겨울에는 선線들만이 살아남는다.
황태 덕장에 내어걸린 겨울은 한여름 찌운 잉여의 살들을 마른 바람이 새긴 결 따라 살뜰히도 뾰족하니 잘도 빼내어 말렸구나.
시냇길 옆으로 난 마을 길 따라 듬성듬성 난 바람결 따라 녹이 슨 대문들 지나 메마른 형태들로 흩어놓은 쓸쓸한 겨울의 추상抽象을 본다.
닫힌 대문 밖에 내어놓은 아이처럼 이름 모를 화분 하나 풀이 죽어 놓여있고 풍성한 잎새에 가려 한여름엔 보이지 않던 고단하게 늘어진 전깃줄이 전봇대를 힘겹게 부여잡았다. 빨랫줄에 널린 몇 마리 참새들 바람에 일렁이며 외로이 펄럭일 때 높은 나무 덩그러니 심장처럼 박힌 까치집은 언제나 겨울엔 더 커져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 동심 묻은 앳된 낙서가 폐가에 어울리지 않게 아직은 햇살 받아 따사로운데 고운 감 두어 개 담장 너머로 오지 않을 아이들을 기다리고 메마른 다리로 여윈 가지 움켜쥔 산새 하나 집을 지킨다.
모두가 숨죽인 적막한 겨울. 눈은 순결하게 대지를 덮고 그 위에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쓸쓸한 이야기를 흔적으로 남겼다. 간밤에 마을까지 내려온 노루는 냇가를 따라 다시 산 위로 사라졌고 먹이를 찾아 눈 위를 서성이던 새 발자욱은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첫 새벽 기차 타러 일터로 떠난 어느 가장의 정직한 발걸음은 해 뜬 늦은 오후에야 사라질 것을 안다. 쓸쓸한 생각을 일으키는 바람. 생각조차 깎아내고 깎아내어 한 줌의 독백 가슴에 남긴다. 나의 유년의 이른 아침 머언 일터로 떠난 아버지의 발자국은 항상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나 있었다.
겨울도 이제 끝나갈 무렵. 얼어붙은 대지에서 메마른 선으로 주고받았던 감정의 언어들을 밟아가며 지난至難한 생명들끼리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던 이곳에 다시 눈이 내린다. 아직 선명했던 발자국. 한 점 두 점 내려앉는 눈이 삶의 흔적들을 말없이 몰래 지우고 연민의 그림자 하얗게 덮인 자리에 새로이 고운 덫을 놓고 햇볕을 얹어주었다.
―시집『새로이 고운 덫을 놓고 햇볕을 얹어 주었다』(상상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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