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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쉽게 미화한다
정국희
괜히 약속을 깼다 그리고 낮잠을 잤다
나쁜 꿈으로 머리가 젖었다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면서 뉘른베르크를 생각했다
머리를 말리다 말고 젖은 머리로 집을 나섰다 길을 따라서 그냥 걸었다
집집마다 잔디의 길이가 똑같아서 쓸쓸했다
쓸쓸해서 몸을 똑바로 세우고 나를 궁리하며 걸었다
피아노를 칠 줄 모르는 나는 음계부터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손가락 놀림이 더딘데다 눈썰미까지 없어 배우는 것에 느려도
줄기차게 연습하면 못할 것도 없지
블루베리를 먹는 꿈이 아니고
슈바인스학세를 먹는 꿈도 아니었다
썰물 빠진 바다를 걷다가 돌아보니 밀물이 밀려와 길이 막혀버린 꿈
육지가 저 멀리 보이고 숨이 막혀오고 내 머리로 죽음이 쏟아지던 꿈이었다
어느 집에선가 풍겨오는 브뢰첸 빵 냄새가
젖은 머리를 빨갛게 말리는 오후
나는 피아노를 매일매일 연습하는 내 손가락을 상상했다
정원이 잘 꾸며진 집을 말티즈가 지나가고 나는 말티즈를 지나가고
서로의 눈빛이 마주쳤을 때
약속을 왜 깼지?
나는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옆을 보며 앞으로 걸었다
―웹진 『시인광장』(202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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