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인터체인지
조병화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2008 조선일보가 연재한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편」중 [제98편]
<시의 행과 연구분에 대해서>
어느 분이 자기는 다 보았다고 하면서 책을 한 권 내밀었습니다. 동인시집 「청하문학」제5호였습니다. 발행은 06년 12월 15이며 <문예수필>과 <수필시대>를 교집하여 '청하문학회' 로 합집합을 이루었다고 발문에 나와 있습니다.
이 동인시집에는 최금녀 시인의 「餘」와「자화상」,「달빛 수의」가 실려있는데 이 시는 <큐피트의 독화살>에도 실려있습니다. '달빛 수의'는 띄어쓰기 붙여쓰기를 조금 수정하였고 나머지 두 편은 연을 조금 다르게 하여 그대로 실려있습니다.
시를 다 보고 난 뒤 뒤편에 수필을 읽다가 수필 속에 인용이 되어있는 시 한 편을 보았습니다. 조병화 시인의 「인간관계」1982년 발표였습니다. 이 수필을 쓴 사람은 김수정으로 전국청하백일장 운영위원으로 되어있으며 「인간관계」가 들어있는 수필의 제목은 「마로니에의 추억」입니다.
이 시를 읽으니 인간관계 오고감의 편안함, 불편함의 그 오묘함이 다 들어있는 것 같고 조병화 시인의 마음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저 또한 인간관계의 부담 때문에 여기저기 잘 기웃거리지를 못하기에 이 시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인터넷이 전 국민의 고속도로가 되고 카페, 블러그가 활성화되면서 몇 십년의 무소식이던 초등동창을 찾는 것쯤은 이제 땅 짚고 헤어치는 것보다 더 쉬울정도로 인터넷세상은 그리움의 세계를 앗아가기도 했습니다.
카페 생활 몇 년동안 많은 문학카페와 사이트를 가보았더니 조용하고 아늑한 카페가 있는가 하면은 어떤 한 사람의 자아도취형의 망상가 같은 허풍쟁이 카페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시의 숲이 잘 가꾸어진 아담한 시의 마을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바로 '시하늘'이라는 카페였습니다.
이곳은 좋은 시를 문고판 정도의 계간지를 통해 비매품으로 저렴하게 보급을 하고 있었고 시가 무분별하게 돌아 다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를 올리면 출처를 반드시 밝히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저곳 수많은 곳을 다니는 동안 시의 오자와 행과 연의 마음대로 갈라놓은 부작용을 하도 많이 보아와서 그런지 이곳은 잠시 푹 쉬었다 가도 좋을만큼 부담없는 시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에다 조병화 시인의 「인간관계」라는 시를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뜻하지 않게 이 시의 제목은 '공존의 이유' 이고 연과 행이 틀리다는 지적의 답시가 달렸고 '시는 시집에 실린 원문 그대로 올려져야' 한다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저으기 당황을 했습니다. 시집을 보고 직접 올린 것이 아니라 수필 속에 삽입된 시를 그대로 올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 발표된 같은 시를 보면은 띄어쓰기와 붙여쓰기 오타뿐 아니라 연과 행구별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제 저는 이 모든 것이 인터넷의 폐단이고 부작용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인터넷에 카페와 블러그가 성행하면서 시에다 음악과 영상을 입히면서 시를 올리는 사람들이 영상에 맞게 행과 연을 마구 제멋대로 뜯어고치는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시에 자각이 없는 사람들이 별 뜻없이 행·연 구별에 중요성을 모르고 그렇게 올리는 사람도 많이 있는 줄로 압니다.
하지만 시인들 자신이 신문이나 문학지에 발표된 시를 시집에 넣으면서 행과 연뿐 아니라 제목까지 수정하는 것도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에서 행과 연이 중요하고 어디서 어떻게 가르느냐 따라 시의 맛까지 달라지기에 시인으로서는 나중에 내는 시집에서 다시 손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으나 발표 선후에 따른 많은 시들이 인터넷 여기저기에 옮겨다니며 혼란을 부추기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발표선후에 따라 제목이 다른 시를 예로 들수도 있지만 연구분의 혼란이 더 큰 것 같아 그 중에 많이 알려진 문인수 시인의 「쉬」라는 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시 「쉬」는 시가 좋은만큼 여러곳에서 집중조명을 받았고 여러책에 많이 실렸습니다. 그런데 시가 어디 어느 곳에 실리든 원문 그대로 인용이 되어야하는데 이 시는 인터넷뿐 아니라 최근에 출간된 책에서조차 연구분이 달랐습니다.
10□문인수 쉬 -「쉬」, 문학동네, 2006년
반경환 명시1,2 제1권 102쪽
07년에 출간된 반경환의 명시1,2에는 연 구분이 없고, 08년에 나온 나희덕 시인이 엮은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 에는 이 시가 4연으로 연 구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내친 김에 이 시가 실려있는 책을 다 찾아 보았습니다. 제 49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에는 연 구분이 없고 도종환 시인과 안도현 시인이 추천했다는 국립공원 시인의 집에 있는 시집'자연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제2편 55쪽 에도 연 구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일보에 연재한 시인이 추천한 100편의 애송시(43)편에 보면은 나희덕 시인이 엮은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 처럼 4연으로 연 구분이 되어 있는데 연 구분이 또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인터넷도 아닌 거의 최근에 나온 시집에조차 연구분이 이렇게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궁금했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몇몇 사람에게 이메일로 문의를 했더니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답변도 없기에 문인수 시인에게 메일로 문의를 드렸습니다. 답변을 이렇게 보내 왔습니다.
'발표 당시, 그리고 시집에도 연구분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회에 이 시를 낭송하면서 편의상 연구분을 해보았더니 읽기도, 의미 파악도 훨씬 낫습디다. 그래, 나희편 그 책자에 실린 것을 앞으로 '원본'으로 삼기로 작정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문인수
제 궁금증은 풀렸지만 시가 사이버세계에 이렇게 마구잡이로 돌아 다니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시인들은 처음 발표때에도 띄어쓰기와 붙여쓰기 행과 연 구분에 좀 더 신중을 기하고 새로운 시집에 시를 넣어서 수정을 할 때는 주를 달아놓은 것도 한 방법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사람을 사귀지 않고 인간관계 없이 홀로 살 수 있을까요. 사람이 사람을 사귀는 것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을 주지 않고 남의 마음을 가져올 수는 없겠지요. 내 속마음 주지않고 남의 속마음 가져올 수 없기에 내 마음 주고 싶지 않는 사람은 인간관계를 잘 맺지도 못합니다.
사람을 음식 편식하듯이 가려서 좋아하고 나빠해서는 안되겠지만 어쩌겠어요. 입에 맞는 음식에 손이가고 싫은 음식에 손이 가지않듯 미운사람은 밉고 좋은 사람은 여전히 좋은 것을 보면 너울가지가 모자라는 사람에게 있어 인간관계는 늘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겠지요.
자, 그럼 우리도 이만 정치인이 유세를 하듯이 악수를 하고 웃으면서 헤어질까요. 부담이 없는 내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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