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露宿)
송수권
큰 삶은 큰 덫에 걸리고 작은 삶은 작은 덫에 걸리는가
풍뎅이는 거미줄에 걸리고 쥐는 쥐덫에 걸리는가
어떤 덫이 와서 내 삶을 망가뜨릴 때도 나는
이제 원망하지 않으련다. 하늘엔 별이 반짝이고 있으므로 별에게
길을 묻고, 인간에겐 사랑이 있으므로 사랑하련다
나의 露宿이 비록 험한 길 위에 있을지라도 밤마다
옷깃을 적시는 詩의 이슬이 영롱하고 내가 엉망이 되어
쓰러진 자리, 비록 혼돈의 시대에도 별은 저렇게 빛났으므로
어떤 고통에 찬 신음이 내게 와서 나를 좀슬게 할지라도
이 우주 안의 한 작은 파도 소리에 씻기고 씻겨, 햇빛이 오는 한낮은
저 개펄 위의 젖은 물잎새들처럼 젖어 피련다
-시집『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시와시학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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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를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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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
이시영
밤 열한 시가 넘으면 새알팥죽으로 야식을 돌리는 한 곁에서 라면박스와 조선일보로 잠자리를 펴는 모습들이 분주합니다. 그 옆에서 벗어놓은 신발도 내일을 향해 아주 단정합니다.
-계간『시평』(2006,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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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
박남희
그리움도 저렇듯 웅크리고 있으면
어두워질까
온몸으로 신문지의 글자를 읽고 있으면
잠이 올까
그리하여
수많은 발자국 소리 속에
먼 발자국 소리 하나 아주 지워질까
누군가가 몹시 그리울 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와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시집『고장 난 아침』(애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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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露宿)
안도현
양말 한 켤레를 빨아
빨랫줄에 널었다 청명한 날이다
빨랫줄은 두말없이 양말을 반으로 접었다
쭉쭉 빨아먹어도 좋을 것을
허기진 바람이 아, 하고 입을 벌려
양말 끝으로 똑똑 듣는 젖을 받아먹었다
양말 속 젖은 허공 한 켤레가
발름발름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바지랑대 끝에 앉아 있던 구름이
양말 속에 발목을 집어넣어보겠다고 했다
구름이 무슨 발목이 있느냐고 꾸짖었더니
원래 양말은 구름이 신던 것이라 했다
아아, 그동안 구름의 양말이나 빌려 싣고 다니던 나는
차마 허공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월간『현대문학』(2011,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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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
이영종
열차와 멧돼지가 우연히 부딪쳐 죽을 일은 흔지 않으므로
호남선 개태사역 부근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열차에 뛰어들었다는 기사를 나는 믿기로 했다
오늘밤 내가 떨지 않기 위해 덮을 일간지 몇 장도
실은 숲에 사는 나무를 얇게 저며 만든 것
활자처럼 빽빽하게 개체수를 늘려온 멧돼지를 탓할 수는 없다
동면에 들어간 나무뿌리를 주둥이로 캐다가
홀쭉해지는 새끼들의 아랫배를 혀로 핥다가
밤 열차를 타면 도토리 몇 자루
등에 지고 올 수 있으리라 멧돼지는 믿었던 것이다
사고가 난 지점은 옛날에 간이역이 서 있던 자리
화물칸이라도 얻어 타려고 했을까
멧돼지는 오랫동안 예민한 후각으로 역무원의 깃발 냄새를 맡아왔던 것일까
역무원의 깃발이 사라진 최초의 지점에
고속철도가 놓였을 것이고 밝은 귀 환해지도록 기적소리 들으며
멧돼지는 침목에 몸 비벼 승차 지점을 표시해 두었으리라
콧김으로 눈발 헤쳐 숲길을 철길까지 끌고 오느라
다리는 더욱 굵고 짧아졌으리라
등에 태우고 개울을 건네줄 새끼도 없고
돌아갈 숲도 없는 나는 오랜만에 새 신문지를 바꿔 덮으며
그때 그 역 근방에서 떼를 지어 서성거렸다는
멧돼지 십여 마리의 발소리를 믿기로 했다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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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들
김사인
48년 9개월의 시간 K가 엎질러져 있다
시원히 흐르지 못하고
코를 골며 모로 고여 있다
액체이면서 한사코 고체처럼 위장되어 있다
넝마의 바지 밖으로
시간의 더러운 발목이 부었다
소주에 오래 노출되어 시간 K는 벌겋다
끈끈한 침이 흘러
얼굴 부분을 땅바닥에 이어놓고 있다
시간 K는 옆구리가 가려운 겨드랑이 부위를 가지고 있다
잠결에 긁어보지만 쉬 터지지는 않는다
흘러갈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더러운 봉지에 갇혀 시간은 썩어간다
비닐이 터지면 시간 K도
힘없는 눈물처럼 주르르 흐를 것이다
시큼한 냄새와 함께 잠시 지하도 모퉁이를 적시다가
곧 마를 것이다 비정규직의 시간들이
밀걸레를 가지고 올 것이다
허깨비 같은 시간들, 시간 봉지들
(문학동네, 봄호)
-이은봉·김석환·맹문재·이혜원 엮음『2011 오늘의 좋은시』(2011,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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