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워라, 꽃!
이안
식전 산책 마치고 돌아오다가
칡잎과 찔레 가지에 친 거미줄을 보았는데요
그게 참 예술입디다
들고 있던 칡꽃 하나
아나 받아라, 향(香)이 죽인다
던져주었더니만
칡잎 뒤에 숨어 있던 쥔 양반
조르륵 내려와 보곤 다짜고짜
이런 시벌헐, 시벌헐
둘레를 단박에 오려내어
툭!
떨어뜨리고는 제 왔던 자리로 식식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식전 댓바람에 꽃놀음이 다 무어야?
일생일대 가장 큰 모욕을 당한 자의 표정으로
저의 얼굴을 동그랗게 오려내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퉤에!
끈적한 침을 뱉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시집『치워라, 꽃!』 (실천문학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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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골 시편
-민달팽이
김신용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나가 버린다
치워라, 그늘!
-계간『문예중앙』 (2006.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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