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이재무
1
봄비의 혀가
초록의 몸에 불을 지른다
보라, 젖을수록
깊게 불타는 초록의 환희
봄비의 혀가
아직, 잠에 혼곤한
초록을 충동질 한다
빗 속을 걷는
젊은 여인의 등허리에
허연 김 솟아오른다
2
사랑의 모든 기억을 데리고 강가로 가다오
그리하여 거기 하류의 겸손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게 해다오
살 속에 박힌 추억이 떨고 있다
어떤 개인 날 등 보이며 떠나는 과거의 옷자락이
보일 때까지 봄비여,
내 낡은 신발이 남긴 죄의 발자국 지워다오
3
나를 살다간 이여, 그러면 안녕,
그대 위해 쓴 눈물 대신 묘목을 심는다
이 나무가 곧게 자라서
세상 속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가지마다 그리움의
이파리 파랗게 반짝이고
한 가지에서 또 한 가지에로
새들이 넘나들며 울고
벌레들 불러들여 집과 밥을 베풀고
꾸중 들어 저녁밥 거른 아이의 쉼터가 되고
내 생의 사잇길 봄비에 지는 꽃잎으로
봄비는, 이 하염없는 추회
둥근 열매로 익어간다면
나를 떠나간 이여, 그러면 그대는 이미
내 안에 돌아와 웃고 있는 것이다
늦도록 봄비 싸돌아 다닌 뒤
내 뜰로 돌아와 내 오랜 기다림의 묘목 심는다
- 시집『위대한 식사』(세계사, 2002)
이재무의 시는 어렵지 않다. 어려운 낱말을 일부로 골라 쓰지도 않고 낯설기나 시각적인 형식으로 강제로 행을 가르지도 않고 억지로 비틀지도 않는다. 단순히 기교만으로 시를 쓴다면 가벼워질 수도 있지만 부담이 없다고 해서 무게가 없는 것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읽혀지는 가운데 희망의 메시지를 담는다. 묘목을 심는 것을 희망을 심는 것이다. '너' 가 나 고, 나 가 너' 라는 일원론으로 시를 쓰는 이재무 시인에게 봄비와 식물은 '너이자 곧 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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