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어떤 여정 / 박소란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10. 8. 23:33
728x90

   어떤 여정


   박소란

 

  
   어느 날 마침내
   우리가 아르항가이 고요한 초원에 서게 될 때
   그때는 당신, 몇 마리 순한 양들을 몰고 내게로 와 줘
   다부진 눈매의 사내가
   오랫동안 아껴온 여인에게 청혼을 하러 먼 길을 나서듯
   한발 한발 설레는 걸음을 걸어 어린 날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렇게
   당신이 걷는 몇 날 며칠 그 낮과 밤 동안
   세상의 꽃과 바람과 강물은 결코 잠들지 않아
   옛날 옛적 무너진 어워의 돌무더기에도 흥건히 젖이 불어
   그 속 발간 뿌리를 박고 자라나는 한 망울의 순정한 빛을
   당신은 보게 될 테지 하지만 이내
   청춘의 산록을 지나는 사이 걸음은 차츰 더뎌지고
   고단한 시간의 짐을 짊어진 당신의 늘어진 어깨 위론
   내지의 적막을 견디는 별들의 깊은 한숨과 절망이 스며들겠지
   대지 곳곳 살아있는 것들을 온통 휘몰아 쓸듯 시린 어둠이 밀려들면
   우리의 길은 그만 까마득 잊히고 말겠지 나의 게르는 먼지처럼 부서져
   서쪽 산자락 어디쯤에선가 곡을 하듯 마두금 소리 울려 퍼지고
   늙은 양들은 그대로 쓰러져 눈을 감겠지
   서서히 식어가는 모닥불 앞에
   홀로 앉은 당신은 소리 내어 엉엉 울게 될지도 몰라
   꽃과 바람과 강물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이제 두 번 다시
   아침을 밝아오지 않겠지
   지난날의 쇠한 발자국들만이 아득한 이곳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지
   이미 당신은 없고 이생의 머나먼 길마저 한 편의 고약한 꿈으로 끝이 날 때
   그때는 와 줘 내가 당신의 열두 번째 아내가 될게     

 

 


   -웹진『시인광장』(2011, 6월호)
   2012-10-08 월요일 23시 31분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란와인 / 박이화  (0) 2012.10.09
아빠가 다른 쌍둥이 / 강기원  (0) 2012.10.09
받아쓰기 / 임영석  (0) 2012.10.08
비밀에 대하여 / 임영석  (0) 2012.10.08
목련의 첫 발음 / 복효근  (0) 2012.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