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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에 대하여
엄영석
네 애인의 첫사랑 같은 거 너무 캐묻지 마라
꽃들이 제 향기와 무덤을 생각하고 피는 것은 아니다
누구 좋으라고 피는 건 더 더욱 아니다
어쩌다 술 취해 하룻밤 잤다고 애인이라면
장미 여관에서 서너 명씩 손님 받는 그 여자
하룻밤 남자들 줄 세우면 숲을 이루고 남을 것이다
엉덩이가 좀 쳐져 있으면 어떠냐
쌍꺼풀 수술로 눈이 짝짝이면 어떠냐
오늘도 키스 방 알바를 하며 혀를 내주던 여자도
제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키스를 할 줄 모르는 여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돌을 감싸고 자라는 나무가 돌의 나무가 아니듯
물속에 뿌리내려 자라는 나무가 물의 나무가 아니듯
먹구름 속에 감추어진 빗방울처럼
비밀은 항상 네 몸 밖에 있다 물고기가
물 밖에서 살지 못하는 것처럼
네 애인의 비밀을 아는 순간 너의 애인이 아니다
물 밖의 세상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네 애인을 물 밖으로 꺼내지 마라
비밀이란 물 밖에 나와 썩어 가는 물고기들의
살 냄새에 불과하다
-계간『시에』(2010, 가을호)
-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 시 100선』(아인북스, 2011)
2012-10-08 월요일 15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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