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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
심보선
사랑하는 두 사람
둘 사이에는 언제나 조용한 제삼자가 있다
그는 영묘함 속으로 둘을 이끈다
사랑에는 반드시 둘 만의 천사가 있어야 하니까
둘 중 하나가 사라지면
그는 슬픔의 옆자리로 가서 자신을 이끈다
사랑에는 반드시
"잊지 마"라고 속삭이는 천사가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나는 모른다
신(神)이 낮과 밤을 가르는 시간을
두 사람이 신 몰래
서로의 영혼을 황급히 맞바꿔야 했던 시간을
그 시간을 매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매혹 이후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간다
매혹 이후
한 사람의 눈빛은 눈앞에 없는 이에 의해 빚어진다
매혹 이후
한 사람의 눈빛은 눈앞에 없는 이에게 영원히 빚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생의 가장 깊은 주의를 기울이며
"하얀 돌 위에 검은 돌"*을 올려놓듯이
사랑과 비밀을 포개놓을 수밖에
나는 어렴풋이 기억한다
목욕을 막 끝낸 여자의 어깨 위에 맺힌 물방울을
남자가 용기를 내 닦아주려 하자
더 작고 더 많을 구슬로 훝어지던 그것을
커튼 사이로 흘러들던 한 줄기 미명과
입술 사이에 몰려 있던 한 조각 어둠
그런데
한 눈동자 안에 시작과 끝이 모두 있었던가?
나는 이제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
거미줄처럼 서로를 이어주던
눈빛과 눈빛의 무수한 교차
그 위를 바삐 오가는 배고픈 거미처럼
새벽녘까지 끝날 줄 모르던 이야기
바로 그날 태곳적부터 지녀온
아침이라는 이름을 잃어버린
환하고 낯선 하나의 세계
* 세사르 바예호의 시 제목에서 인용.
-계간『문학동네』(2010, 겨울호)
2012-10-18 목요일 11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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