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그 밤에 내린 눈은 / 길상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 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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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밤에 내린 눈은


  길상호

 


  유리에 닿아도 지문 남지 않는 손가락이었어, 무슨 말인지 단서가
없는 수화를 읽어낼 수 없었어, 밤이 이불 끌어 덮으며 더 깊이 잠들
때 너도 답답해져서는, 수없는 문장들을 한꺼번에 쏟아놓기도 했어,
영하의 눈금보다 추워질까 창은 열지 못했지, 말을 걸면 뿌옇게 김
이 서리는 대화, 서로 다른 온도의 이야기가 유리를 사이에 두고 한
동안 계속되었어, 말들이 성에로 꽃필 때까지 방과 밖의 수은주 그
래프는 간격을 벌렸어, 더는 좁힐 수 없는 거리에서 너는 너대로 나
는 나대로 바닥에 누웠지, 따뜻한 바닥에서 내 심장에 살얼음 끼는
동안 너의 심장은 차가운 바닥에 녹아버렸을까, 바람벽 뚫고 들어
온 바람이 전하는 안부 속에도 이제는 네가 사라졌어

 

 


-월간『현대문학』(2009.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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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밤에 내린 눈은


  길상호

 

 

  유리에 닿아도 지문 남지 않는 손가락이었어, 무슨 말인지 단서
가 없는 수화를 읽어낼 수 없었어, 밤이 이불 끌어 덮으며 더 깊이
잠들 때 너도 답답해져서는, 수없는 문장들을 한꺼번에 쏟아놓기도
했어, 영하의 눈금보다 추워질까 창은 열지 못했지, 말을 걸면 뿌옇
게 김이 서리는 대화, 서로 다른 온도의 이야기가 유리를 사이에 두
고 한동안 계속되었어, 말들이 성에로 꽃필 때까지 방과 밖의 수은
주 그래프는 간격을 벌렸어, 더는 좁힐 수 없는 거리에서 너는 너대
로 나는 나대로 바닥에 누웠지, 따뜻한 바닥에서 내 심장에 살얼음
끼는 동안 너의 심장은 차가운 바닥에 녹아버렸을까, 바람벽 뚫고
들어온 바람이 전하는 안부 속에도 이제는 네가 사라졌어

 

 

 

천양희|장석남 외 지음『시, 사랑에 빠지다』(현대문학. 2009)

 


 

|시작노트|


  온도가 맞지 않는 대화들을 나누었다. 네 심장 위에서 내 심장을 얼렸여야
하는데, 내 심장 위에서 네 심장을 녹였어야 했는데, 이제 성에가 끼는 대화도
더는 나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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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충남 논산 출생. 2001년 ≪한국일보≫로 등단.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
들다』『모르는 척』<이육사문학상 신인상> <천상병시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