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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포트
방수진
손이 예쁜 남자를 사랑하기로 한다
한번도 본 적 없고
만져본 적 없는
매끈한 손등과
백년간의 홍수와, 두 번째로
못생긴 별에서의
불시착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한다
나의 여름이 비틀거리며
사막을 횡단해 걸어오는 동안에도
집어 삼킨 이야기들이 문드러져
손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순간에도
이곳의 아침은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고 기록하기로 한다
이 별의 여자는 곧잘 싱그러움을 질투한다
잘 익은 사과를 씹어 먹으며
살이 오를 대로 오른 신생아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떠올리고
구두 위로 붉어져 나온 복숭아뼈가
제 가슴을 어루만지는 상상을 한다
이곳은 누구도 죽지 않고
어디도 어두워지지 않는
사악한 화성의 누이
미소가 예쁜 여자아이는 곧잘 입이 찢어지고
종종 숨겨놓은 일기를 파묻는다
누구와도 악수하지 않고
쉽게 손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나의 겨울이 이곳의 하루를 알고 싶지 않은 것처럼,
죽은 여자들이 줄지어 행렬하고
나무가 스스로 나이테를 지워나가는 밤
쏟아 내린 눈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악몽이 지속될 때
비로소 나는 행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할 것이다
처음 이곳을 밟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서서히 발을 지우기 시작할 것이다
가던 목적지를 잊고,
들고 있던 장바구니도 놓은 채,
화성의 누이에게
최초의 악수를 건넬 것이다.
송곳으로 손금으로 파내는 습관이 있다
문지를수록 또렷해지는 기억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해 줄
패스포트라 믿고 있다
-월간『시산백』 (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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