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먼 곳으로부터 바람 / 이제니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 12.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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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곳으로부터 바람


  이제니

 


  빨강과 파랑이 섞이는 풍경을 보고 있었다.
  밤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서.


  너는 걸어 다니는 시,
  울면서, 잠들면서, 노래하면서,


  순간의 순간에서 순간의 순간으로
  리듬에서 시작해서 리듬으로 끝나는
 

  만난 적 없는 색깔이 섞이는 밤이다.
  너에 대해 속삭이고 속삭이는 밤이다.
 

  하나의 몸에서 나뉘어진 두 개의 장면.
  반짝이면서 하얗게 사라지는 전날의 거울.
 

  거울의 뒤편에서 거울의 뒤편으로,
  머나먼 곳으로부터 오는 바람 속으로,
 

  웃음, 나는 울지.
  울음, 나는 웃지.
 

  언젠가 앉아 있던 잿빛의 계단
  두 개에서 세 개로 증식하던 너의 얼굴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우린 이미 만났지요.
 

  나무의 흔들림을 바라보면서, 어제의 믿음을 버리면서, 흔들리는 그림
자의 윤곽을 지우면서,
 

  나는 울지, 그 대목에서.
  나는 웃지, 그 거리에서.
 

  멀리서 둥둥 북소리 들려온다. 숲은 고요하고 나무는 자란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없다. 나의 구두는 반짝이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길 위에서.
천천히, 점점 빠르게 내달리면서.


  내가 기억하는 몇 개의 단어
  내가 말할 수 있는 몇 개의 사물
 

  하늘엔 두 겹의 구름이 층층이 부풀어 오르고
  나의 늙고 오래된 개는 말이 없다.


  눈멀고 귀 멀어 자신의 고독 속에서,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순간의 순간에서 순간의 순간으로
  리듬으로 시작해서 리듬으로 끝나는


  나는 울지, 그 계단에서
  나는 웃지, 그 어둠으로


  구름이 다가온다. 빛이 사라진다.
  먼 곳으로부터 바람, 먼 곳으로부터 오는 네가 있다.

 

 

 

-『세계의 문학』(2012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