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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 또한 다 저물고
김충규[1965.11.1∼2012.3.18]
미풍에 아가미가 간지러운지 물고기가 히죽 웃는다
너무 웃어 아가리가 아픈지 다물 줄을 모른다
물기가 아직 지느러미에 묻어 있다
죽는다는 게 고통일까, 물고기에겐
산다는 게 즐거움일까, 물고기에겐
그 반대일까, 물고기에겐
때론 삶이 푸줏간의 갈고리에 걸린 돼지 시신같이 느껴질 때 있지
물고기도 그런 느낌이 있었을까 낚싯바늘에 걸렸다가 간신히
도망친 적이 있다면
다 저물고 별의 아가미가 벌름벌름
하늘의 캄캄함을 밀어내고 있다 물고기는
욕정에 올랐을 때같이 한동안 파르르 떨다가 숨을 멎고
누가 내게 당신은 물고기를 닮았군요, 라고 말했다면
아마도 내 지느러미는 오랫동안 앓았을 것이다
내 몸에 돋아난 비늘을 뜯어낼 때마다
미풍이 스쳐 지나갔다
몹시 낡은 철제 계단에 앉아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초로의 사내,
지느러미에 상처를 입어 제 집으로 가는 방향을 잃은 게지
내 십몇 년 후의 모습을 미리 지켜보는 일이란
비늘을 몰래 뜯는 일보다 쓸쓸해
미풍에
비의 냄새가 스미어 이내 얼룩이 지는 캄캄
아주 많이 지상의 쓸쓸함을 지켜본 별들은
빗물에 떠밀려 우주의 하류로 휩쓸렸고
다 저물어,
몸이 죽음을 다급하게 부르듯
미풍이 조금은 가쁜 숨소리로 출렁인다
-계간『시와 사람』(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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