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곁을 떠난지 어언 45년… 나는 아직 당신과 동거 중입니다”
시인 김수영의 아내이자 문학적 동지였던 김현경 씨가 시인의 사후 45년 만에 첫 산문집 ‘김수영의 연인’을 펴낸다. 김 씨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굴곡진 삶을 시인과 함께했지만 “김 시인은 내게 운명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김 시인과 결혼할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용인=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刹那)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 김수영의 시 ‘사랑’ 》
1960년 김수영 시인의 동생인 김수환 씨 결혼식에 참석한 김현경 씨(왼쪽)와 김 시인이 뒷줄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시인의 어머니 안형순 여사. 실천문학사 제공
“김 시인(김수영)은 초고를 원고지에다 안 쓰고 백지에 썼어. 이 양반은 원고지도 뒤집어서 백지에 썼지. 초고가 완료되면 무조건 나를 부르는 거지. 제일 왕성할 때는 마포 구수동에 살림을 차렸을 때였어. 구공탄에 밥을 짓는데, 그 밥이 부글부글 끓을 때 서재로 나를 부르는 거야. 그러면 나는 밥이 탈까 아예 솥을 내려놓고 들어갔지.”
김수영(1921∼1968)의 아내는 1950년대 후반의 서울 마포로 가 있었다. 시인을 떠올리는 그의 눈망울이 촉촉하다. “얼마나 까다로운지 원고지를 앞에 딱 내놓고 정좌 상태로 앉아 있어. 그러면 (내가) 시 제목, 그리고 김수영이라고 쓰고 한 자 한 자 정서를 했어. 행여 한 자라도 잘못 쓰면 ‘다시!’라고 했지. ‘땜질’이 안됐어.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썼지. 그렇게 써서 한 통은 잡지사에 보냈고, 하나는 간직했고….”
‘풀’ ‘폭포’를 비롯해 수많은 현대시의 걸작들을 남긴 김 시인. 지금 전해 내려오는 그의 육필 원고들은 대부분 부인 김현경 씨(86)의 글씨다. 1942년 문학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난 이들은 부부의 연을 맺었고, 두 번 헤어졌다 다시 만났고, 1968년 시인이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떴다.
시인의 부인은 그가 떠난 지 45년 만에 그 추억을 담은 첫 산문집 ‘김수영의 연인’(실천문학사)을 이달 말 펴낸다. 18일 경기 용인시 마북동에서 김 씨를 만났다. 여든을 훌쩍 넘긴 시인의 아내는 지금도 고왔다. 가볍게 화장을 했고, 헤어밴드와 팔찌로 포인트를 잡았다. 자리에 앉자 그는 포도주와 육포, 딸기를 내왔다. “손님이 오면 한 잔씩 내와요.” 세련된 손님맞이였다.
그는 신(新)여성이었다. 문단이란 말도 생소했던 1940년대. 이화여대 문과생이었던 그는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폴 발레리의 시를 읽었다. 이화여대 교수였던 정지용의 예쁨을 받았고, 김소월의 ‘산유화’에 곡을 붙인 작곡가 김순남이 오촌 당숙이다. 김순남의 집에 놀러가서 자연스럽게 임화 오장환을 비롯한 문인들과 어울렸다.
미와 지성을 겸비한 그는 남성 문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김수영의 선린상고 2년 선배이자 도쿄 유학시절 친구였던 이종구를 통해 1942년 김수영을 처음 만났다. 이듬해 김수영이 귀국하며 둘은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 양반이 시를 쓰니까 같이 문학에 ‘턱’ 빠졌지. 박인환이 하던 마리서사(종로의 서점)에 가서 일본 전후파 시집들을 같이 읽고 흥분하고 했어.”
하지만 김 씨에게 김수영은 첫사랑이 아니었다. 이른바 ‘흑인 시’를 쓰던 배인철(1920∼1947)과 사귀었던 그는 1947년 남산에서 데이트를 하다 한 괴한이 쏜 총에 애인이 죽는 것을 옆에서 봤다. 그도 옆구리에 총을 맞았다. ‘배인철이 공산주의자였다’란 소문이 돌자 함께 있던 김 씨의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씩 떠났다. 하지만 김수영만은 예외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외면했지만 김수영만은 제게 남았어요. ‘네 재주가 아깝다. 너는 문학을 해야 한다’며 저를 다독여줬죠.”
1949년 초겨울부터 동거에 들어간 김수영과 김현경은 1950년 4월 결혼한다. 하지만 둘의 행복은 짧았다. 6·25전쟁이 터지자 김수영은 징집당해 전선으로 갔고, 포로가 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머물게 된 것. 1952년 김수영이 수용소에서 나온 뒤 둘은 피란 수도 부산에 살았지만 판잣집 생활을 면치 못했다.
김현경은 취직하기 위해 이종구를 찾아갔다가 그 집에 머물게 된다. 그를 흠모했던 이종구가 김현경을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김수영은 이종구의 집에 왔다가 아침 밥상을 차리는 김현경을 보고 말없이 “같이 가자”고 했다. 하지만 김현경은 “먼저 가세요”라고 말한다.
이종구의 부친은 김현경에게 “이혼을 하고 새로 결혼하게 김수영의 도장을 가져오라”고 말한다. 그 등쌀에 밀린 김현경은 서울을 찾는다. 종로 보신각 옆에 있던 주간잡지 ‘태평양’ 건물. 2층에 올라가자 김수영이 보였다. “1년 만의 재회였는데 제 얼굴을 보고 좋아하더군요. ‘저기 뒤에 조그만 여관이 있는데 거기 가서 좀 있으라’고 하데요. 말이 떨어지지 않아 ‘저기…도장…’이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알아채고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군요.”
김현경은 김수영의 도장을 받아왔다. 하지만 차마 이종구의 부친에게 전달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이종구 집을 나와 서울 성북동에 방을 하나 얻었지요. 소설을 한번 써보고 싶어서 밤낮으로 문학을 했지요. 몇 달 뒤 제 결심을 알리고 싶어 김수영에게 엽서를 보내 성북동 다방에서 보자고 했어요.”
자신을 버렸던 여자의 느닷없는 엽서. 김현경은 김수영이 안 나올 줄 알았단다. 약속한 오후 5시를 일부러 넘겨 30분 늦게 찾아간 다방. 김수영은 출입구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말쑥한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1954년 둘이 헤어진 지 2년여 만의 해우였다.
“차를 시키고, 둘이 말 한마디 없었죠. 한참 있다가 ‘나가자’ 하더군요. 대뜸 ‘약수동(당시 김수영의 집) 가자’ 하더군요. 시댁으로 들어가는 것은 용기가 안 나서 ‘내가 성북동에 방 한 칸 얻어놨어요’라고 말했죠. 그 길로 성북동으로 들어가 다시 부부가 됐고, 15년을 함께 살았죠. 다시 만난 날 밤 ‘나 평화신문 가서 취직하고 올게’라고 말하더군요. ‘아이 러브 유’라는 말보다 더 좋았죠. 돈 벌어온다는 얘기였으니까요. 이튿날 정말 취직해서 오더군요.”
김수영 시인이 직접 쓴 시 ‘풀’의 초고(위). 아래는 경복국민학교에 다니던 둘째 아들 김우의 한자 공부를 위해 김 시인이 쓴 글.
이후 김수영은 번역일도 많이 하고, 서울대와 연세대 강단에도 섰다. “그 사람이 집에서 글 쓰고 내가 바느질할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그가 집에 있어도 그리웠지요. 가만히 서재 문을 열고 들여다보면 그는 이런 말을 했어요. ‘야, 너 말야. 어젯밤에 내가 해줬는데 뭐가 더 궁금해서 왔냐.’ 뭐 이랬죠. 사실은 전날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렇게 놀렸죠.”
김수영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40년 넘게 그는 문단을 멀리 했다. 이번 책을 낸 것은 “김수영의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다. 같이 산 20여 년의 시간보다, 떨어져 있던 세월이 두 배가 넘지만 아내는 남편을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다. 아내는 책 말미에 ‘나는 아직 당신과 동거 중입니다’라는 편지글을 붙였다.
‘1940년대에 처음 당신을 아저씨로, 그저 꿈 많던 한 문학소녀의 선생님으로 맺은 첫 인연이 부부의 연으로 이어져 이렇게 질길 줄이야…. 당신보다 반세기를 더 살고 있는 내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모든 시가 나의 버팀목이 되었고…. 당신, 수영. 꿈에서라도 나타나주기라도 하면, 이 책과 함께 당신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용인=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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