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독서‧독자 / 호병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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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의 의식 앞에 스스로를 개방하고 있는 독서 대상물은 그 의미내용이 파악되는 순간부터 ‘종이’라는 물질적 객체가 아니라 하나의 이성적 존재로서 그의 의식을 우리가 지각하게 하고 그의 사고를 우리가 사고하게 한다. 그런데 의미내용이 대상물에서 파도쳐 나오는 대신 장벽 안에 폐쇄되어 존재하기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개방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당연히 모든 글을 읽을 의무가 없는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손끝에 침을 바를 것이다. 이런 독서현상은 새삼스런 게 아니다. 이때의 독자는 비평가, 작가, 일반 독자들 모두에게 해당된다. 비평가라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일반 독자라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 못하는 건 결코 아니다. 서녘 노을을 보며 누구나 황홀감을 느낀다. 좋은 작품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비평은 문학작품의 분석에 있어 거의 반세기 동안 이 분야를 석권했고 지금도 그 위력은 강력하다. 이의 큰 특징의 하나는 작품을-작가나 독자, 그것이 써진 역사적 시대로부터 독립되어 있거나 필연적 관계를 갖지 않는- 스스로 존재하는 예술적 객관물로 보는 것이다. 해석의 유일한 원천은 작품이다. 이는 작품이 객관적 의미를 형성할 만큼 모든 부분이 서로 조화하고 완전하게 연관이 되어 있는 유기체적 전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런 인식은 오직 텍스트에서 모든 의미와 가치를 도출하고, 독자를 포함한 기타의 것은 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독자는 배제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독자’와 그들의 ‘반응’을 중시하는 이론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이론가들은 독서 과정에 대한 논의에서 독자들이 중심적 관심을 갖게 되지 못하고 오히려 무시되었다고 판단한다. 텍스트는 그것이 어느 독자에 의해 읽힐 때까지는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지도 않는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독자들이 독서의 시선을 거두어 다른 곳으로 돌릴 때 그 예술작품은 존재가치를 잃고 하나의 종이로 남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실제로 독자는 텍스트를 창조하는 데 참여한다. 독자가 어떤 경험을 텍스트에 결부시키든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독자이고 텍스트가 무얼 의미하는지 말할 사람도 독자이기 때문이다. ‘독자가 없으면 텍스트는 없다’라는 이런 독자반응 이론은 비평가들에게 텍스트의 자율성보다는 독자와 독서 과정에, 독자와 텍스트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에 주의를 집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말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해석의 현실성을 선언하는 것과 같고 최대한 객관성을 추구하던, 전통적인 문학 분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주관성과 상대성의 해석은 객관적 결정론에 회의를 느끼는 현대과학 자체에서 비롯된다. 발생하는 모든 것은 명확한 원인을 가지며 일정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객관적 인과론은 상대성이론과 불확정성이 지배하는 양자이론에 의해 무너진다. 더구나 모든 과학적 지식은 관찰자의 좌표계에 달려 있다는 새로운 증명은 관찰자의 주관성을 강화하고 있다. 즉 입자의 위치를 측정할 것인지, 입자의 운동량을 측정할 것인지는 관찰자에 달려 있고 어느 하나를 측정하기 위한 장치를 설치한다는 것은 다른 것에 대한 측정 장치를 배제하는 것으로, 결국 관찰 대상은 관찰자의 선택과 분리될 수 없다. 독서현상에서 독자는 바로 관찰자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독자는 초연한 객관적 관찰자의 역할만을 할 수가 없다. 관찰되는 대상, 즉 작품의 속성에 그가 영향을 미치는 만큼 그 세계에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강조되는 것은 관찰되는 대상 자체도 관찰자에 달려 있는 것처럼 작품을 읽을 것인지 아닌지도 바로 독자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객관적‧기계론적 결정론의 고전물리학 세계에서 관찰자가 배제되었듯, 텍스트에 모든 의미와 가치를 두는 독서 과정에서 독자는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논리의 비약일지 모르나 배제된 관찰자는 관찰에서 멀어지고 그 세계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수많은 예술작품이 독자의 의식 속에서 함께 호흡을 나누지 못하고 ‘인쇄된 종이’에 불과한 단순한 질료로 떨어져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참여와 선택으로 독서현상에 개입하는 독자의 중요성은 이 정도로 하자. 이처럼 독자가 독서현상의 좌표에서 중요한 지점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객체로서의 예술작품에 대한 강조는 작품 스스로가 독자를 밀어내고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감각과 정서의 심미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복합적인 내면의 사유와 그 미묘한 파동선을 그려내기 위해 작가는 고도의 수사적 세련성을 채택하고 자신만의 독자적 문체를 구축하려 한다. 언어의 특수성을 최대한 활용하고 그것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 최대의 복합성과 통일성을 가지고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의 텍스트를 위해 작가는 모든 표현기법을 동원하여 봉헌한다. 텍스트의 난해성이 필연적으로 대두되는 것이다. 독자는 다시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들에게 독자의 접근을 차단하고 순수와 고답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난해성’은 불가피하다. 그들의 관점에서 문학은 심미적 소양과 문학 교육을 받은 소수의 독자를 위한 암호문 같은 글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선택된 ‘소수의 독자’마저 독서 과정의 ‘쾌감과 즐거움’은 기대하기 힘든 것이다. 예로 이상의 오감도 연작을 독서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러나 모더니즘은 ‘찬란한 예술적 성좌’로 서구세계를 풍미했고 우리나라의 많은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를 추수했다. 박인환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떠난 숙녀를 이야기한다’는 내용의 〈목마와 숙녀〉를 썼다. 이대로 썼다면 선명한 의미 파악과 함께 완전한 서정적 문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옷자락’과 ‘목마’와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라는 기호를 견인해 시에 섞어 넣는다. 결국 그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고 작품을 마침으로 일상의 의미를 무의미로 전환시키고 만다. 그가 시에 견인한 인명과 사물은 구체적이고 사전적 정의로도 명확히 풀이된다. 그러나 시는 논리적 해석을 거부하고 짙은 암시성의 냄새만 풍기는 심상들의 집합으로 변모되었다. ‘먼지의 나날들은/ 사진첩 속으로 낡아갔다’라는 시구(詩句)가 있다면 이미 시로서 미적 형상에 완벽하게 육박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어떠한’ 먼지의 나날인지, ‘어떻게’ 낡아 가는지 수식의 물감을 뿌리기 시작한다. ‘건물의 무게를 증발시키던’이 ‘먼지의 나날’ 위에 뿌려진다. 시인은 만족하지 않는다. 시인은 ‘무엇’이 건물의 무게를 증발시켰는지 또 다른 수식이 필요하다. 결국 ‘햇살마저 낡아’라는 원인의 수식이 또 뿌려진다. 마찬가지로 ‘사진첩’ 앞에는 ‘낙엽의 머리칼을 묻고’라는 행위의 수식이, 이에 더해 ‘배반의 담벼락에’라는 장소의 수식이 더해진다. 결국 “햇살마저 낡아 건물의 무게를 증발시키던 먼지의 나날들은/ 배반의 담벼락에 낙엽의 머리칼을 묻고 사진첩 속으로 낡아갔다”(이미란 〈오래된 국도가 그립다〉 부분 《내 남자의 사랑법》)고 마무리함으로써 심상만 반짝거릴 뿐 시는 쉽게 독해되기를 거부한다. 시인은 서로 다른 이미지를 결합하여 어떤 상징을 창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결국 이 상징은 두 개의 이미지를 심리적으로 결합하거나 분리시켜 독자 스스로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 상징은 어떤 분명하고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는 일종의 ‘틈새’를 남긴다. 이미란의 많은 시가 구체적이고 강한 시각적 감각을 주는 심상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모호하다. 그리하여 “풍선의 이빨”(〈당신의 이름이라는 고도〉), “치맛단 속에 부풀은 서랍의 손잡이”(〈눈물의 세헤라자데〉), “민들레홀씨의 두드러기”(〈안단테 칸타빌레〉) 등과 같이 구체적이고 감각적 심상이지만 독자는 스스로의 사색과 추적을 통해 그 의미를 캐내 가야 하는 수고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현대시의 난해성은 시인이 자신의 주관으로 상징을 설정하고 이에 자신이 의도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데 기인한다. 시의 난해성은 시가 잘못되어 생긴 것도 아니고 직관과 우연으로 생긴 것도 아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오랜 시간의 사고와 습작을 통한 절제가 직관과 우연을 조절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는 이해한다. 구상의 탄탄한 기본 없이 추상으로 건너뛸 수는 없는 법이다. 위의 시에 비해 아예 ‘감각’ 자체를 무시하고 감각이 불가능한 비의미의 장을 열고자 하는 시도 있다. 최근 문예지에 발표된 이러한 시 하나를 예거하자면, “나는 감각을 내려놓고/ 기억 안 할 거야// 우리 집에서는 파출부조차 하얀색을 입어/ 나는 미남만 사는 나라에서 왔어/ 머리 위에 화산재 같은 사과가 있는/ 나는/ 많아/ 반했니/ 너도 사과 먹을래/ 나는 많다고// 도착하고 떨어지고”(이우성 〈처음 여자랑 잤다〉 전문)와 같은 시를 들 수 있다. 불행하게도 나의 무지는 이 시에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물론 반복되는 정독을 통하여 시인이 익숙한 일상 감각의 동질성을 해체하고 비가시적, 비언표적인 감각 영역을 보여주고자, 나아가 ‘모든 관계의 정립 속에서 구성된 기호의 진정한 바탕은 무’라는 것을 증언하기위해 의도적으로 이런 ‘의미의 불투명함’을 채택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시 전편이 언어적 콜라주에 해당되고 ‘사과가 있는 나는 많다’로 파악되는 문장은 언어의 통사적, 지시적 관계를 벗어난 비문으로 아무래도 낯설다. 이 시를 보며 반심미적, 반전통적 예술 행위를 기술하는 용어로 사용된 의성어적 유아어 ‘다다’가 떠오른다. 특히 “나는 많아” “반했니” “너도 사과 먹을래”와 같은 짤막한 대화체는 유아 언어의 전형을 느끼게 한다. 유일한 직유인 “화산재 같은 사과”는 다다이즘을 특징짓는 이른바 ‘충격 전략’으로 보인다. 시인은 일간지 신춘문예 출신으로 떠오르는 별이다. 앞으로 한국 시단의 중추적 역할을 할 사람이다. 시인은 예술을 비판하기보다는 그릇된 예술 관행을 비판하며, 인간성을 거부하기보다는 그런 인간성을 야기한 사회를 거부하고 있다. 전통과 인습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새로운 삶과 문학의 방향을 부단히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이 이 시에서 작가의 의도적인 이런 ‘의미의 불투명함’을 이해하기 위해 오래 머리를 싸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의무도 없다. 사실 무질서하고 부조리한 현대세계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현대시의 난해성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엘리엇은 ‘현대문명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다양하고 복잡한 결과를 초래’하고 시인은 언어를 ‘자신의 의미로 강압’하기 위해, ‘자신의 의미로 탈구’시키기 위해서, 더 ‘포괄적이고 암시적이며 간접적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작품이 난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명백히 하고 있다. 난해한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은 단순히 예술작품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소비자가 아니라 그 의미를 능동적으로 창출하는 생산자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이론가는 역설적으로 작품의 ‘난해성’이 분리되어 있던 예술가와 독자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켜준다고까지 주장하지만 이 말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가 말하는 독자는 텍스트의 의미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문학적 감식력을 가진 소수의 엘리트 독자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작품의 난해성으로 수많은 일반 독자들을 잃게 되었으며, 예술가와 독자 사이는 더 큰 괴리가 발생한 것이 사실이다. 다시 독자의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고대 그리스부터 긴 전통을 가지고 발전해온 수사학은 실상 설득의 기술이다. 애초 웅변술에서 채택한 수사학은 결국 청중을 설득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던가. 이제 수사학은 독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문학작품에 반응하도록 하는 데 사용되는 수많은 방편이자 책략이라고 간주하면 고대인들은 독자반응 이론의 선구자다. 작품해석에서 독자에게 현저한 위치를 부여한 현대 비평가인 웨인 부스는 수사학을 “독자를 조종하기 위한 작가의 수단”(《소설의 수사학》 1961)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독자는 작품 해석에 있어 작가와 ‘거래’할 수 있고 ‘협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좀 더 원론적인 문제로, 문학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며 무슨 소용이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기원전부터 있었다. 인간이 지금까지 도달한 해답은 그것을 읽는 독자에게 ‘즐거움과 유익함’을 주는 것 외에는 아직까지 얻은 것이 없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쾌감을 준다. 우리에게 유익한 감동도 쾌감의 일종이다. 평론가들이 시에 내재하는 심미적 장치를 찾아 정독을 거듭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찾고자 함이며 이는 바로 문학이 주는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번에는 짧지만, 위와 같은 문학의 존재 이유와 그 소용을 충족시키는, 독자가 불편 없이, 문학의 아름다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넉넉한 미덕을 담지한 시를 보자. “그럭저럭”은 말 그대로 그럭저럭 세월이 흘렀다는 말이다. 그렇다 보니 무슨 특별한 치료를 한 것도 아닌데 아픈 것은 다 나았다는 것이다. “올해도”에서 ‘도’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가진다. 이것은 ‘작년과 같이’가 뒤에 생략된 말로 평범한 일상의 연속을 의미한다. 즉 내 일상은 작년처럼 별 볼일 없이 그저 세월만 흐르고 있다는 자조적 진술이다. ‘김장’이란 어휘가 계절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그리고 다음 연 사이에 긴 휴지(休止)가 있다. 마침내 화자는 사랑했던 상대방을 영탄조로 부른다. 이제 다음의 행까지 다시 의미의 휴지가 계속된다. 그리고 기가 막힌 현실이 토로된다. ‘고동색 파카’는 남자들이 일상에 흔히 입는 윗도리다. 그러나 사랑했던 사람이 사준 옷이다. 큰 의미가 담겨 있는 옷이다. 지금 그 귀중한 옷이 동파를 방지할 목적으로 수도 펌프에 입혀 있다. 사람이 입는 옷의 본래 기능조차 상실하고 한 사물을 싸매고 있다. 생의 허무와 무상이 짙은 페이소스로 담겨 있는 서정시로 독자의 직관에 포착되어 가슴을 때리는 작품이다. 자벌레는 자신이 ‘자벌레’라는 것도, 자신의 움직이는 행위가 ‘자질’이라는 것도 모르는 미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인의 형형한 눈에는 그 미물의 끊임없는 동작이 바로 우주를 ‘자질’하는 것으로 포착된다. 어떤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을 때 쓰는 ‘문득’이라는 부사어는 절묘하다. 자벌레는 우주를 측정하기 위해 고민한 일이 없다. ‘문득’ 우주의 넓이가 얼마나 되나 궁금해서 ‘자질’하기로 결정하고 우주를 건너간다. 그런데, ‘그런데’라는 접속부사를 사용하며 시인은 저쪽 우주 끝에서 자벌레가 왜 다시 돌아오는지 그 이유를 묻는다. 간단하다. 잘못 잰 건 아닌지 또 궁금해서 우주를 다시 재며 돌아오는 것이다. 이런 시인의 발상은 독자들의 입을 벌어지게 한다. 엄청난 과장이다. 그러나 이런 과장은 독자에게 또 다른 쾌감을 선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호연정’이라는 정자 이름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독자들은 이런 정자가 실제 있는지 작가가 지어낸 것인지 알 방도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말이 호연지기(浩然之氣)라 할 때의 ‘호연’이라는 점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도 큰 기운이 호연지기인바, 호연정 대청마루는 자벌레에게 있어 광대무변한 우주에 다름이 아니다. 시인은 작고 여린 벌레의 움직임에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용기, 그리하여 사물에서 해방된 충만한 자유, 즉 호연의 속성을 보고 찬양의 헌사를 올린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단정적인 어투를 쓰는 게 아니다. “궁금했던 모양이다” “아마 다시 재나 보다”라고 어느 정도의 개연성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추측을 할 뿐이다. 이 시에는 엄청난 자신감과 고개 숙이는 겸손이 함께 녹아 있다. 시인은 ‘호연’이란 말 그대로 마음이 넓고 뜻이 큰 사람일 것이고 동시에 작은 자벌레의 동작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온유한 사람일 것 같다. 이 시는 독자인 나를 사로잡는다. 나는 바로 앞에서 “이 시는 독자인 나를 사로잡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타인이 나의 내면 가운데서 함께 사유하고 느낀다는 현상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표현한 말이 될 것이다. 독서에 몰입되어 있는 동안 내 안에서 사고하는 ‘나’는 그 글을 쓴 ‘나’이다. 어느 무엇도 나에게 작품으로 전해오는 고유한 주장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독자는 작품에 그의 의식을 맡김으로서 작품을 한 존재로 만들어 간다. 독자는 작품에 존재를 부여할 뿐 아니라 작품이 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준다. 책은 독서행위를 통해 생명력을 획득하고 하나의 인격적 존재가 된다. 그런데 어떻게 독서 행위의 실제적 주체인 독자가 위에 열거한 바와 같이 배제될 수 있단 말인가. “한 사람이 어쩌다 내 책 한 권을 원하여 대금을 지불하고 그의 집으로 가져간다는 사실이 새삼 영광스럽고 감사하다.”고 소회를 표하며, 우리의 문학을 “소박한 미지의 독자에게 바쳐야” 하고 “비록 한 사람이더라도 그는 나의 가슴과 영혼을 나누는 진지한 이웃”이라는 한 원로시인의 독자에 대한 애정 어린 글을 읽고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쓰는 이글은 바로 이 시인의 말을 번쇄하게 확장시킨 글에 다름이 아닌 것 같다. 독자와 작품과의 관계에서 즐겨 인용하는 말이 하나 있다. |
* 출처 : 유심 (2012,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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