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류시화
아무도 내가 말하는 것을 알 수가 없고
아무도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사랑은 침묵이다
자작나무를 바라보면
이미 내 어린시절은 끝나고 없다
이제 내 귀에 시의
마지막 연이 들린다 내 말은
나에게 되돌아 울려오지 않고
내 혀는 구제받지 못했다
-시집『그대가 곁에 있어서 나는 그대가 그립다』(푸른숲.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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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김백겸
숲 속에 자작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흰 눈이 내리고 햇빛이 찬란하게 비친 동지가 지난 어느 날
자작나무는 성스러운 세계목이 되었다
구름 위의 하늘과 대지의 지하를 오르내리는 샤먼의 경배에 의해
온 우주의 소리와 빛을 보고 듣는 천수관음이 되었다
숲 속에 자작나무는 전에는 그냥 평범한 나무였다
봄이 오면 새 잎을 피우고
가을이 오면 흰 가지로써 바람에 온 몸을 내 맡기는
뿌리에 온 몸의 생명을 내려보내 부활의 시간을 기다리는
목숨의 명령에 복종하는 노예였다
숲 속에 자작나무는 어느 날 불멸의 환상을 품게되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질서를 믿기 시작했고
흰 몸과 푸른 잎들은 신의 마음으로 타고있는 불길임을 자각했다
흰 몸과 푸른 잎들이 불사조처럼 날아가
빛과 하나가 되는 존재임을 믿기 시작했다
숲 속에 자작나무는 그 때부터 마음에 빛을 내기 시작했고
신의 모습을 본 모세처럼
숲의 운명을 나무들에게 빛의 침묵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월간『현대시』(200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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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문성해
너의 상처를 보여다오
아무도 내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허연 붕대를 휘날리며 서 있는 자작나무들
오래전
죽은 자의 수의를 걸쳐 입은 듯
온몸이 붕대로 친친 감긴
나무들의 미라여
지하 어딘가에 꼭꼭 숨겨진 그를
지상으로 발굴한 자는 누구인가
보름달 빛이 고대의 자태로 내려오는 밤이면
붕대자락이 조금씩 풀린다고 하고
그 속에서 텅텅 우는 소리 들린다 하고
나는 태초에 걸어다니는 족속이었으니
이것을 푸는 날은 당당히 걸어가리라
그때마다 잘 가꾸어진 공원의 연둣빛 나무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원형의 전설을 들은 듯
한곳에 내린 뿌리가 조금씩 들뜬다 하고
-시집『자라』(창작과비평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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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신용목
질문이 적힌 종이를 구겨 던진 구름들, 천둥으로 번개로 비로 쏟아지
던 활자들
그때 겨울이 왔고
눈이 내렸다, 허공의 젖은 소매에 부딪쳐 반짝이며
흩어지며
생의 비밀을 잃어버린 사금파리처럼
한순간,
깊은 동맥을 그으며
나는 돌 하나를 쥐고 있었다 언젠가 깨진 적 있는 금들의 아름다움,
백골처럼
맞추면, 다시 하나가 되는 조각들
그러나 완성되지 않는 질문들
알고 있다 너를 만났을 때, 나는 너무 많은 꽃들을 꾸며냈다 봄 여름
가을, 가을
끊긴 동맥에서 쏟아지는 끈적한 슬픔을 떠
가을의 마른 잎들을 칠하고
그 붉은 빛깔로만
약속의 차가운 아궁이를 태우며,
그때 겨울이 왔고
나는 돌 하나를 쥐고 있었다 언젠가 백발 마녀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
을,
그러나
아무 소리도 없이 깨지는 하늘처럼
쏟아지거나 떨어지는
질문이거나
영원히 구해지지 않는 해답처럼,
흰 눈처럼
우리는 영혼의 문장을 나눠가진 것 같아
서로 비밀의 활자들을 맞추다, 우리는
날아가는
돌에서 백발이 자라는 것을 보았다
-월간『유심』(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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