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임영조
마을이 타고 있었다
산과 나무와 들녘과 집이
벌겋게 상기된 채
한 켜씩 지워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풍물 잡는 소리로
산탄 같은 참새 떼가 일시에 날고
땅거미가 점령한 수수밭에는
웃자란 녀석들이 포로가 되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장에 갔다 술 취해
뉘엿뉘엿 돌아오는 할아버지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나의 희망이 무엇이냐?)
그 거나한 주정처럼
남모를 노여움이 비틀거렸다
갈 길만 바빠 서러운 노년이
논두렁길 따라 쓸쓸히 나부끼는
하얀 두루마기 자락에
문득 객혈하듯 날인된
저녁놀 한 점
어둑어둑 지워지고 있었다.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1(제2시집)』(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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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정윤천
자운영 꽃밭 속에 염소 두 마리가 서 있다
열창노래방 저녁 속으로 도우미 아가씨 둘
다급하게 사라진다
풍경이 나를 싣고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자
저녁 뉴스는 하루치의 풍경 몇 개를 편집하여
세상 속으로 다시 내팽개쳐준다
운 없이 다리를 다친 풍경 몇 개는
한동안 애쓰며 절룩거려야 한다
풍경은 가끔 쇳내를 뒤집어쓰고
혼자서 녹이 슬기도 하겠지만
먼 데, 풍경이라는 이름의 찻집 유리창 안으로
먼지 둘러쓴 시골 버스가 온다
온다는 것은 내 안의 풍경일 뿐
어쩌면 가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집『구석』(실천문학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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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도종환
이름 없는 언덕에 기대어 한 세월 살았네
한 해에 절반쯤은 황량한 풍경과 살았네
꽃은 왔다가 순식간에 가버리고
특별할 게 없는 날이 오래 곁에 있었네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풍경을 견딜 수 있었을까
특별하지 않은 세월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많은 들꽃 줄에 한 송이 꽃일 뿐인
너를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시집『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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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김영석
마가목 가지에 앉아 있던
멧새 한 마리 날아가고
흔들리는 가지 사이 그 빈 곳을
먼 산 흰 구름이 채우듯
해 질 녘 보랏빛 허공 속으로
한 줄기 기러기 떼 잠겨가듯
언제나 풍경은
늘 빈 곳을 새로 채운
비어 있는 풍경.
-시집『바람의 애벌레』(서정시학,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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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김사인
산모퉁이 잡초 욱은 길로
땡볕 맞으며 가네 흙투성이 늙은이 하나
황소한 마리
새소리도 없네 바람 한 점 없네
발밑엔 푸석한 먼지
저 풍경, 아무도 말하지 않네
실한 팔다리들 다 어디로 가고
이 빠진 늙은것들만
기침에 넘어오는 가래를 우물우물 되씹어넘기네
말하는 이 없네
세월은 홀로 저만큼 앞서가고
금 간 사발 몇 개 남아 있네
땀 흘러
해진 샤쓰는 등에 붙었네
-시집『밤에 쓰는 편지』(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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