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회점경 《조선일보》 1934. 2. 9.
실업자의 심경心境은 그가 아니면 모른다. 아츰에 뜨는 해도 보기 실코, 밤에 뜨는 달도 보기 실코, 모-든 색채 모-든 움즉이는 물체, 아모리 조흔 소리라도 다- 듣기 실코, 도대체 사는 것이 실타. 집안에 잇스면 처다보고 바라다 보고, 무에 나올가 하고 기대리는 집안 식구가 가엽고, 밧글 나아오면 맛나는 사람마다 “요새 무얼하시우” 하는 말을 드르면 주둥이를 쥐여박구 십고
*
어쨌든 그날의 그 해는 지내 버려야 할 터이니 돈 십 전만 잇스면 찻집이 조타고 드러가나 컵피차 한 잔만 먹고 왼종일 안저잇슬 수는 업스니, 길로 헤맨다. 이래서 양복쟁이 룸펜이 된다. 그러나 찻집에는 무위도식군의 출입도 만타. 부랑녀와 부랑자도 여긔서 맛나 가지고는 암흑면으로 다러 간다. 쪽쪽 드리 마시는 찻물이 사람에 따러 맛이 다르고, 먹을 때의 그 순간의 생각이 다- 다를 것이다.
*표기는 원문의 것을 그대로 인용하되, 띄어쓰기는 일부 수정함
안석영安夕影1, 도회점경都會點景, 《조선일보》1934. 2. 9.
백수는 무엇이고 룸펜은 무엇인가. 둘 다 실업자거나 무직자라는 것은 같다. 그러나 백수가 그냥 놀고 있는 사람이라면, 룸펜은 어딘가 사연이 있는 사람의 분위기를 풍긴다. 룸펜 프롤레타리아거나 룸펜 인텔리겐치아라는 단어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각각 무산자無産者 룸펜이거나 지식인 룸펜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룸펜이 나오는 소설을 알고 있다. 염상섭의 《삼대》에 나오는 조병화 같은 인물을 룸펜 프롤레타리아라고 할 수 있다.
룸펜Lumpen. 직업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독일어다. 이 어원을 알기 전에 나는 룸펜이란, ‘방room’에서 빈둥대며 ‘글pen’을 쓰는 사람을 한심하게 여기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백수의 뜻을 알고도 다소 놀랐다. 백수白手. 손이 흰 사람이라는 뜻이다.이렇게 시적이라니 김기진의 시 <백수의 탄식>1924에는 ‘너희들의 손이 너머도 희고나!’라는 구절이 총 네 번 나온다. 정지용의 시 <카페 프랑스>1926에는 ‘남달리 손이 희여서 슬프구나!’라는 문장이 들어 있다.
백조. 우아한 백수라는 의미의 이 말은 어떻게 쓰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백조는 온 몸이 하얀 새다. 그러니 손만 하얀 백수를 능가하는 잉여의 상징이 되고도 남는다. 돈 십 전으로 ‘왼종일’ 카페에서 ‘무위도식’하는 룸펜은 일제 강점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시대의 백조들은 오천 원 남짓한 돈으로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인터넷 서핑을 하고, 보고서를 쓰고, 작업을 한다. 카페는 그런 데가 아닐까. 물 아래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 백조의 다리는 보이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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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영. 1901~1950. 서울 태생. 화가, 작가, 영화감독, 배우, 평론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일본 동경본향양화연구소東京本鄕洋畵硏究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1921년 귀국하여 서화협회 정회원으로 가입하면서 화가로 활동했다. 같은 해 나도향의 연재소설 《환희》의 삽화를 그리며 삽화계의 선구가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 《시대일보》의 미술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출판부 주임을 지냈다. 1922년 극단 예술협회 공연에 배우로 출연하였으며, 극단 토월회土月會에 가입하여 신극 운동에 참여하였다. <노래하는 시절>1930, <춘풍>, <바다여 말하라>1935 등의 영화 각본을 쓰기도 하였는데 특히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한 영화<심청전>1937은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광복 이후 한국영화협의회를 만들고 그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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