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견고한 고독
김현승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 ―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滋養)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견고한 고독』. 관동출판사. 1968 : 『김현승 전집 1』. 시인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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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라타너스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푸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푸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푸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푸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푸라타너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김현승시초』. 문학사상사. 1957 : 『김현승 전집』.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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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시초』.문학과사상사. 1957 : 『김현승전집1』. 시인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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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까마귀 울음소리
김현승
아무리 아름답게 지저귀어도
아무리 구슬프게 울어 예어도
아침에서 저녁까지
모든 소리는 소리로만 끝나는데,
겨울 까마귀 찬 하늘에
너만은 말하며 울고 간다!
목에서 맺다
살에서 터지다
뼈에서 우려낸 말,
중에서도 재가 남은 말소리로
울고 간다.
저녁 하늘이 다 타버려도
내 사랑 하나 남김없이
너에게 고하지 못한
내 뼈속의 언어로 너는 울고 간다.
(『김현승 전집 1』. 시인사. 198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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