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까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1』(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곰곰』(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
post-아현동
안현미
오늘은 아현동 산동네에 갔다
오래 전 월세 들어 살던 방,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하던 방, 연탄불을 넣던 방, 이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울먹이던 방, 외롭던 방, 고맙던 방, 아주아주 춥던 방,
그 시절 내 마음에 전세 들어 살던 첫 애인을 생각하는 밤, 나의 아름다운 남동생의 흐려진 얼굴빛을 걱정하는 밤, 고단한 토끼에게 아무 약효도 없는 안약을 건네던 밤, 가난한 추억과 합체하던 밤,
아현동 산동네를 내려와 찾아간 'BAR다' 어둡고 낡은 나무 계단 끝에서 화장실이 어딘지 모르고 서 있는 머리 긴 외국 남자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Why?"라고 물으며 괜스레 친절하고 싶던 밤, 함께 여기를 뜨자고 말하면 주저 없이 따라가고 싶던 밤, 국적도 모국어도 잃어버리고 싶던 밤, 나 스스로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왜?"라고 자꾸 되묻던 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열정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니? 왜?
―시집『이별의 재구성』(창비, 2009)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 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픈 年代 / 이종진 - 아내의 정부 / 문동만 (0) | 2014.03.14 |
---|---|
박이화 - 흐드러지다1 / 흐드러지다 2 (0) | 2014.02.27 |
몸에게 / 김제현 - 과적위반 / 조재형 - 내가 고맙다 / 신지혜 (0) | 2014.02.22 |
임영조 - 그대에게 가는 길 1 ∼ 17 (0) | 2014.02.06 |
시래기 한 움큼 / 공광규 - 시래기 / 양문규 (0) | 2014.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