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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年代 / 이종진 - 아내의 정부 / 문동만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3. 14.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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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年代

 
  이종진

 

 

  한 사내가 내 방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나보다 몇 살 아래인 그 사내.
  신문을 보며 나의 아내를 불러 커피를 시키고, 아내는 상냥한 대답으로 시중을 든다. 내가 방에 있는데도 아내나 그 사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한다. 나는 들키지 않으려고 방구석 피아노 뒤에 숨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만 보고 있다.


  아이들이 학원에서 돌아와 그 사내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나는 지금 이 방에 있으되 나의 不在에 대하여 고민을 한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사내는 아내의 어깨에 손을 걸치고 TV를 보고 있다. 나도 그 옆에서 아내가 깎아 놓은 사과를 깨물며 TV를 곁눈으로 보고 있다. 아이들이 각각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그 사내는 아내와 깊은 섹스를 한다.


 다시 나의 방에서 나의 不在를 알리는 쾌종시계가 바쁘게 타종을 한다. 꽈아앙, 꽝꽝. 이제 나는 내 방의 한 구석에 나를 버려둔 채, 중년의 슬픈 연대를 쓰기 시작한다.
  운다고 옛사랑이 다시 오련만 뭐, 이렇게 시작하는.

 

 

 

ㅡ시선집『반경환 명시 감상 2』(종려나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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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정부

 

문동만

 


다시 저 사내

아내는 아파 드러누웠고 잠시 아내의 동태를 살피러 집에 들른 것

어떤 남자가 양푼에 식은밥을 비벼 먹다가

그 터지는 볼로 나를 쳐다본다 그래 그렇지 오랜 세월

아내의 정부였다는 저 남자 늘 비닐봉지를 가방처럼

들고 다니며 옛 여자의 냉장고를 채워주는 게 업이라는 사람

평생 조적공으로 밥을 벌어먹었고

씨멘트가루 탓인지 담배 탓인지 목구멍에 암덩어리를 달고서야

일도 담배도 놓았다는 저 사내다

늘 성실했으나 사기꾼들에게 거덜났던 사내다 아픈

옛 여자를 위해 공양인 양 쌀죽을 쑤어 바치고

잔반을 털어 비벼 늦은 점심을 때우고 간다 온다 말없이

문을 잠그고 돌아가는 이 오래보는 삽화의 주인공

나도 이 한낮 그처럼 쓸쓸하여 그가 앉았던 식탁을 서성거린다

개수대는 밥풀 하나 없이 말끔하고 아내는 잠 깊고 그러니

나는 사랑의 무위도식자로 그 행적에 질투하며 순종하고 마는데

그가 되돌아가는 긴 내리막길에 삐걱거리는 뼈마디에

가벼운 보자기에 순종하고 마는데 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아내의 정부! 이 딴 순애일랑 내 못 본 체할 것이니

오래오래 두고두고 즐기시지

 

 

 

ㅡ시집『그네』(창비,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