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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 정진규/윤향기/유현숙/최창균 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3. 16.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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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수유
   ―알 1

 

   정진규

 

 

   수유리라고는 하지만 도봉산 바로 咫尺이라고는 하지만 서울 한복판인데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정보가 매우 정확하다 훌륭하다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벌 떼들, 꿀벌 떼들, 우리 집 뜨락에 어제오늘 가득하다 잔치 잔치 벌였다 한 그루 활짝 핀, 그래 滿開의 산수유, 노오란 꽃숭어리들에 꽃숭어리마다에 노오랗게 취해! 진종일 환하다 나도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두근거렸다 잉잉거렸다 이건 노동이랄 수만은 없다 꽃이다! 열려 있는 것을 마다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럴 까닭이 있겠는가 사전을 뒤적거려 보니 꿀벌들은 꿀을 찾아 11킬로미터 이상 往復한다고 했다 그래, 왕복이다 나의 사랑도 일찍이 그렇게 길 없는 길을 찾아 왕복했던가 너를 드나들었던가 그래, 무엇이든 왕복일 수 있어야지 사랑을 하면 그런 특수 통신망을 갖게 되지 光케이블을 갖게 되지 그건 아직도 유효해! 한 가닥 염장 미역으로 새카맣게 웅크려 있던 내 사랑아, 다시 노오랗게 사랑을 採蜜하고 싶은 사람아, 이건 아직도 유효해!


 

 
―시집『알詩』(세계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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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윤향기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 울음

그치는가 싶더니

무명천 안개 자락에 지리는 배냇똥

자오선 살얼음을 헛디디며 몇 만 리를 흘러왔는지

반가부좌 엉덩이마다 환하게 피는 봄

 

깨금발로 지나쳐간 내 사랑의 뒤란에

샛노랗게 반짝이는 등불 한 송이

 

 

 

ㅡ웹진『시인광장』(201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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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유현숙 


 

골목 끝에는 둘러 선, 겨울옷이 허름한 장꾼들이

도박 윷판 밑에 지전(紙錢)을 질러 넣는다

 

영등 바람이 장바닥을 쓸고

남자들은 발부리에 와 걸리는 막걸리 빈 통을 걷어차며 윷가락을 집어든다

손매가 거칠고 단순하다

 

산(散), 한가운데 고요히 앉아 잡념을 던지고 있던 노승이

먹고무신을 미처 꿰신지도 못하고 맨발로 뛰어나와 반기더라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손톱 끝에 산수유처럼 피어나는

사대부중의 저녁이다

모든 내가 당신의 첫 꽃이다

 


 

―계간『시로 여는 세상』(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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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최창균
 

 

아무래도 산수유나무는

저 많은 햇빛 쪽쪽 빨아먹었거나

벌컥 다 들이마셨을 테지

배부르다 배불러 하면서

징징 쟁여 넣었을 테지

그러니 온통 붉은 열매로 산수유하지

그러니까 나뭇가지에 새들이 날아와서는

배부르다 배불러서는

붉게 울거나 붉게 웃을 테지

 

 

 

―웹진『시인광장』(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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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꽃


박형준

 

 

논둑에 앉아 산수유를 바라봅니다

얕은 구릉에 무리져 핀 산수유가

논바닥 웅덩이에 비칩니다

빛이 꽃 그림자에서 피어납니다

저쪽에서부터 농부가 황소를 몰고

생땅을 갈아엎고 있습니다

논바닥 웅덩이가 흔들립니다

땅에서 향내가 솟구칩니다

소발굽에서 물집 잡힌

저 산수유꽃 그늘

이런 아침에 당신 생각이 더 간절해집니다

산간마을의 봄빛이 저 만큼 깊습니다

 

 


―시집『춤』(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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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꽃

 

최광임

 

 

넓은 냄비에 카레를 끓인다

불꽃의 중심에서 꽃잎을 젓는다

굴참나무 아래 쪽빛 드는 구릉 사이

타닥타닥 산수유꽃 피어나듯

약한 불꽃 가장자리에서부터 오르는 기포

철판도 더 뜨거운 한쪽이 있다니,

그대 앞에선 나도 뜨거운 꽃이지 않던가

세상은 자꾸 배면을 더 할애하지만

억척스레 빛을 끌어다 덮고 열리는 몸

불판 중앙으로 냄비의 위치를 바꿔놓는다

한동안 노란 속살까지 차오르는 뜨거움

삶의 어느 한 때가 뜨겁지 않겠는가

봄날의 빛이 또 산란한다

유독 내 가슴이 먼저 가 닿는 곳

까르르르

산수유꽃 같이 끓어오르는

내 몸을 저어다오

 

 

 

―계간『애지』(200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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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수유꽃

 

이은봉

 


등불 환히 켜 들고 걷는 하늘길이다
길 끊긴 곳, 빈 공중을 향해 내뿜는
샛노란 물줄기다 절벽 끝까지
몰려와 삐약거리는 저 병아리 떼
산기슭 어디에도
나아갈 길 없다 종종거리며
치마끈 풀어 헤치는 봄, 자궁 속으로
뜨거운 모가지, 처박을 수밖에 없다
마른버짐 피어오르는 얼굴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꽃이여 그만 등불을 꺼라
끝내 네가 되지 못한, 지난 겨울의 꿈
산골짜기 시린 물그늘 속으로
조용조용 스며들고 있다 이울고 있다.

 

 

 

―시집『걸레옷을 입은 구름』(실천문학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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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꽃 피는 마을


황형철

 

 

나비 날고 벌도 찾지만

겨울은 가시지 않아

춘분 지난 지리산은

이마에 흰 눈 가득 얹고 있다

지난해 붉은 열매

조랑조랑 타오르던 열기가

여태껏 남아

뒤늦게 발동이 걸렸나보다

상춘객들로 부산한 골목길을 돌아내리자

일제히 나무에 젖이 도는지

부르르,

부, 르, 르,

마을 전체가 몸을 떨더니

망울 하나 둘 활짝 피어나

꽃 그림자가 깊다

옛 것들에 기대어

무량하게 핀 산수유꽃을 바라보며

온갖 작은 것들도

접을 붙이는지

아지랑이 속에서 나부대는

봄날이다

 

 


―계간『시와 사람』(200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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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화염나비떼

 

정윤천

 

 

구례 산동 마을에 소방서도 없이

대책도 없이

 

산수유, 화염나비떼

 

켜켜이 개켜두었던 방 안의 것에서부터

벽장에 가둬놓았던 은밀함까지 들고 나와

 

흔들리며

 

흔들리며

널어대기 시작하는

 

널다가

널다가

지칠 만큼이나 널어버린

 

막무가내로 널고

죽을 듯이 널기도 하는

 

그러고 나면, 이 산중엔

누비고 감친 맵시의 누비이불의 바다

 

어쩌자고

저렇게도 화염나비떼의 바다

 

 

 

―시집『십만년의 사랑』(문학동네,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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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마을에 갔습니다


강연호

 

 

지리산 산동 마을로 산수유 사러 갔습니다
산동 마을은 바로 산수유 마을이고
그 열매로 차를 끓여 마시면 이명에 좋다던가요
어디서 흘려들은 처방을 핑계 삼았습니다만
사실을 가을빛이 이명처럼 넌출거렸기 때문입니다
이명이란, 미궁 같은 귓바퀴가 소리의 출구를 봉해버린 것이지요
내뱉지 못한 소리들이 헌꺼번에 귀로 몰려
일제히 소용돌이치는 것이지요,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니면서
이 소리와 저 소리가 한데 뒤섞이는 것이기도 하구요
어쨌거나 이명은 이명이고 산수유는 산수유겠지만
옛날에는 마을의 처녀들이 산수유 열매를 입에 넣어
하나하나 씨앗을 발라냈다던가요
산수유, 하고 입안에서 가만가만 소리를 궁글려보면
이명이란 또한 오래전 미처 못다 한 고백 같은 것이어서
이제라도 산수유 씨앗처럼 간곡하게 뱉어낼 것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붉은 혀와 잇몸 같은 열매가 간절했답니다
어쩌면 이명이 낫는 대신, 지난봄의 노란 꽃잎마냥 눈이 환해지거나
열매처럼 붉은 목젖이 자랄 수도 있었겠지요
마을은 한창 산수유 열매를 따서 널어 말리는 중이었습니다
씨앗을 들어낸 뒤 마당이나 길바닥에 펼쳐놓은 열매들은
넌출거리는 가을빛에 쪼글쪼글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문득, 장롱에 차곡차곡 개켜 넣은
철 지난 옷가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처럼 서글펐답니다
이제 돌아가면 오래전 쑥뜸 자국 같은 한숨 한번 몰아쉰 뒤
이명보다 깊이 잠들 수 있을는지요
산수유 사러 산수유 마을에 갔습니다

 

 

 

- 시집『기억의 못갖춘마디』(문예중앙,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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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꽃을 보며


조창환

 


아직은 이른 봄, 바람 사나운데

찬비 내린 날 아침 노란 산수유꽃들

새앙쥐 같은 눈 뜨고 세상을 본다

 

연하고 여린 것들 마음 설레게 하여

메마른 가지에 바글바글 붙어 있는

산수유꽃들 시리게 바라본다

 

세 이레 강아지들 눈 처음 뜨고

마루 밑에서 오글오글 기어나오듯

산수유꽃들도 망울 터뜨리고

새 세상 냄새 맡으러 기어나온다

 

산수유 마른 가지에 노란 꽃들이

은행나무에 은행 열리듯

다닥다닥 맺혀 눈 뜨는 것을 보면

 

찬비 그친 봄날 아침, 흐윽 숨 막혀

아득한 하늘 보며 눈감을밖에

 

 


―시집『피보다 붉은 오후』(문학동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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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아래서 징소리를


김길나

 


그녀의 맨발을 만져보고 싶었으나
그녀는 일찍이 땅 속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묻힌 흙에서 빠끔히 떡잎이 눈 뜨고
떡잎에 숨은 길 한 가닥이 불쑥 일어나
줄기는 허공을 주욱 찢어 올리고
가지들은 또 낭창낭창 허공을 건드리고
허(虛)를 찔린 허공이 여기저기서 째지고
째진 공(空)의 틈새에서 얼굴 하나씩이 피어나고
이렇게 수많은 그녀가 그녀의 맨발에서 솟아났다


파르르 떨리는 허공의 틈새마다에서
울려나오는 저 소리는 번쩍이는 징소리
그리고 연달아 징을 치는 쟁쟁한 해 뭉치
공을 트고 나온 얼굴들을 푸르게 두들겨 펴는.

 

 

 

―계간『다층』(200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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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꽃 진 자리 / 나태주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주긴 해야 했는데
마음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 꽃 옆에 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유 꽃이 외워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놀러온 산새에게 들려주고
시냇물 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차마 이름까진 말해줄 수 없어 이름만 빼고
알려준 나의 말
여름 한철 시냇물이 줄창 외우며 흘러가더니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이 소리도 입을 다물고
다만 산수유 꽃 진 자리 산수유 열매들만
내리는 눈발 속에 더욱 예쁘고 붉습니다.

 

 


―계간『시와 시학』(200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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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꽃 필 때면

 

이병금

 


바람소리 파도치는 날

산수유꽃망울이

가지마다 등불을 매답니다

어린 꽃나무가

눈부신 햇살의 푸른 물살에 놀라

뾰족뾰족 노란 울음을 터뜨립니다

 

엄마의 품 속처럼

햇살의 바다는 따뜻합니다

 

 


―시집『거울등불을 켜다』(시와시학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