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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다 1
박이화
옛사람은
종이에 맹세를 적었다
더 옛사람은
나무 기둥에 새겼다
희고 단단한 나무에 그 마음 새겨 두면
죽어서도 나이테처럼 한 몸이 되리라 생각했을까?
그런데 그보다 더 옛사람은
조개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새겨
무덤까지 가지고 간 이도 있다
살도 썩고 머리카락도 썩고 마침내 마지막 뼛조각마저
한 줌 흙으로 돌아간 후에야
비로소 깍지 풀 듯 스르르 사그라질 그 마음
그래서 백 년은 환생에 걸리는 시간
나비를 잊고 있을 때만 나비가 내 어깨에 앉듯
당신과 내가 이 뼛속 사무치는 봄날을 잊은 채
붉은 배롱꽃으로 하품하며 다시
피고 질 후생까지의
그 백 년의,
흐드러지다 2
박이화
간밤
그 거친 비바람에도
꽃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도리어 화사하다
아직 때가 안 되어서란다
수분(受粉)이 안 된 꽃은
젖 먹은 힘을 다해
그러니까 죽을힘을 다해
악착같이 가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단다
그러나 으스러질 듯 나를 껴안고 있던 그대 팔이
잠들면서 맥없이 풀어지듯
때가 되면 저 난만한 꽃잎도 시나브로 가지를 떠난단다
아무도 먹을 수 없는
눈꺼풀 스르르 내려앉는 그 천만근의 힘으로
때가 되어 떠나는 일 그러하듯
때가 되어 꽃피는 힘 그 또한
누가 말릴 수 있을까?
때가 되어
그대 앞에 만판 흐드러진
내 마흔 봄날도 분명 그러했을 터
―시집『흐드러지다』(천년의시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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