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꽃
이병기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 때 밥은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도 읊고 싶구나.
지난 봄 피는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어떨 건가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현대문학》(1953. 3)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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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꽃
장석주
여기 울밑에 냉이꽃 한 송이 피어 있다.
보라, 저 혼자
누구 도움도 없이 냉이꽃 피어 있다!
영자, 춘자, 순분이, 기숙이 같은
어린 시절 함께 뛰어놀던 계집애들 이름 같은,
촌스럽지만 부를수록 정다운
전라남도 벌교쯤에 사는 아들 둘 딸 셋 둔
우리 시골 이모 같은 꽃!
냉이꽃
어찌 저 혼자 필 수 있었을까.
한 송이 냉이꽃이 피어나는 데도
움트는 씨앗이 꿈틀거리는 고단한 생명 운동과
찬 이슬,
땅 위를 날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몇 날의 야밤과
피어도 좋다는 神의 응락,
줄기와 녹색 이파리를 매달고 키워준 햇볕과
우주적 찰나가 필요하다!
―시집『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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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꽃
송찬호
박카스 빈 병은 냉이꽃을 사랑하였다
신다 버려진 슬리퍼 한 짝도 냉이꽃을 사랑하였다
금연으로 버림받은 담배 파이프도 그 낭만적 사랑을 냉이꽃 앞에 고백하였다
회색 늑대는 냉이꽃이 좋아 개종을 하였다 그래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긴 울음을 남기고 삼나무 숲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냉이꽃이 내게 사오라고 한 빗과 손거울을 아직 품에 간직하고 있다
자연에서 떠나온 날짜를 세어 본다
나는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계간『유심』(201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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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꽃
고명자
살얼음 우수처럼 깔린 우수 무렵이었지요 도려내도 열길 스무길 다시 자라는 것은 관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월의 모퉁이에서 한 줄기 뿌리를 내리고 꽃대 끝에 아기별 무리 내려오는 날 기다렸습니다 차가운 땅에 등대고 누워 한 동이 눈물 쏟아 부은 까닭은 순한 밤 별로 나앉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고향의 소꿉친구 같이 다정한 이름 지천에 깔려 서럽습니다 밤하늘에 그려놓은 사자자리 전갈자리 무더기 무더기 내려와 봄 언덕이 흔들리면 가슴 절절한 이가 와서 안부를 묻겠지요
―계간『시로 여는 세상』(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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씬냉이꽃
김달진
사람들 모두
산으로 바다로
신록(新綠) 철 놀이 간다 야단들인데
나는 혼자 뜰 앞을 거닐다가
그늘 밑의 조그만 씬냉이꽃 보았다.
이 우주
여기에
지금
씬냉이꽃이 피고
나비 날으다
(『한 벌 옷에 바리때』. 민음사 1990 : 『김달진 시시집』. 문학동네. 199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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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꽃 공양
김왕노
누가 조용히 살다가
저렇게 공양하고 갔을까
햇살과 밤을 버무려
일조량을 맞추어
냉이꽃 무더기무더기
밥상처럼 잘 차려두고 갔다.
그리움이
목 잘린 닭같이 푸덕이다가
생피 흘린 자리
누가 죽은 청춘을 묻고
울다간 자리
그렇게 흩날린 삶의 비듬
거름발 되어 저렇게 잘 차린 공양
냉이 꽃 무더기 무더기
나도 살면서
단 한 번만이라도 한 그릇 공양
잘 차릴 수 있을지
죄에 물든 손을 씻고
보일 듯 말듯 한 꽃 속에
수술과 암술을 심은
냉이꽃향기 진동하는 공양을 차리고
저물어간 사랑의 명복을 위해
천 배 만 배를 올릴 수 있을지
뻐꾸기 울음
봄날을 한 뜸 한 뜸 바느질해도
여전히 어두운 저 세월의 둔덕에
누가 환하게 잘 차려놓고 간
냉이꽃 공양 무더기 무더기
―계간『불교문예』(200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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