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동백 시 모음 - 장석남/오세영/김형출/문충성/신현정/김명원...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3. 26.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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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장석남 

 

 
아흔아홉 개의 빛나는 잎으로는
아흔아홉의 눈 마주친 얼굴들을 비춰 감추어 두네
또 아흔아홉의 그늘 쪽 검소한 잎에는
숨어서 볼 수밖에 없던 사람의 이목구비나 손의 맵시들을,
연중 몇 번 겨우겨우
짧은 햇볕 만나 젖듯 새기어 두네
숨죽여 수년을 묵혀 두면 그 내력 가장 가파른 순서가 생겨
꽃으로 차례차례 올려놓으니 그 빛깔이
정갈한 숯불 같을 수밖에는 없는 일
뻑뻑이 겹친 꽃잎의 메아리여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속으로 치솟아가는 메아리여
일생 사랑의 법칙이 그러하려니
한쪽 귀는 반드시 닫고서
그 곁에 앉아 보네
 
 

 


ㅡ월간『유심』(2014년 3월호 - 신춘기획/시인이 사랑한 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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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오세영

 

 

괜찮다.
괜찮다.
부풀어오르는 밀물 탓이다.
개펄을 채우고 둑을 넘쳐서
마당까지 벙벙히 넘실대는
물,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탓이다.
옷고름 풀어헤치고 치마를 들치며
속살 간질이는
갯바람,
괜찮다.
괜찮다.

 

사릿날
초조(初潮)의 부끄러움으로
발갛게 달아오르는
처녀의
볼.

 

 


ㅡ시집『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시와시학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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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김형출

 

 

안에 감추어진 불더미

마구 꺾고 싶거든

 

재넘이 자국 짚고

숫눈에 떨어지는 몸엣것

사랑을 아는 꽃

 

바다 너머 해조음에 갇힌 긴 숨비소리

훔치고 싶거든

 

달팽이관에 물어보자 동박새야

빠알간 눈물 보았느냐고?

돌아올 사람 없는 빈자리에

꽃잎 주워 담고 홍조가 수줍은

솟대보다 겸손하고 장미보다 붉은 눈

 

 

 

ㅡ시집 『낮달의 기원』(문학의전당, 2013)
ㅡ월간『유심』(2013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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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문충성

 


누이야.

동백꽃 피어나는 꽃소리 들어본 적 있느냐.

사각사각 맨발로 하얀 눈 한 겨울 캄캄함을 밟아올 때

제주바다는 이러저리 불안을 뒤척이고

찬바람을 몰아다니던 낙엽 소리 돌돌 잠재우며

밤새 동백꽃 피어나는 꽃소리 아련히

 

 


―정호승 외 지음『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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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신현정 

 

 
눈 나리어 나리어

세상의 길들이 다 사라진 거기

어느 날 문득 그녀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나를

그리고 그녀가 무슨 인기척에 새벽을 나와 볼 적에

그야말로 섬뜩 놀라 자지러질 발자국이라도 찍어 놓고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것을 궁리 중인데

어쩔거나

아 동백꽃이나 꽝 찍어 놓아야겠다.

 

 

ㅡ유고시집『화창한 날』(세계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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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선운사에서


김명원
 

 

지고 말면 그뿐
흔적이 살아 있던 자리에
바람조차 성글 터인데


그랬으면 좋겠다
내 사랑 어디에도
있었다 속죄하지 않아도 되는
 

불현듯 피었다 지는
선운사 동백처럼
 

지고 나면 그뿐
아무란 자취 찾을 수 없어 눈 머는
깨끗한 허무였으면 좋겠다

 

 

―시집『달빛 손가락』(시학,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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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정훈

 


백설이 눈부신
하늘 한 모서리


다홍으로
불이 붙는다.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그 뉘를 사모하기에
이 깊은 겨울에 애태워 피는가.

 

 

 

《자유문학》(1959. 3)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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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박남준
 

 

동백의 숲까지 나는 간다
저 붉은 것,
피를 토하며 매달리는 간절한 고통 같은 것
어떤 격렬한 열망이 이 겨울 꽃을 피우게 하는지
내 욕망의 그늘에도 동백이 숨어 피고 지고 있겠지


지는 것들이 길 위에 누워 꽃길을 만드는구나
동백의 숲에서는 꽃의 무상함도 다만 일별해야 했으나
견딜 수 없는 몸의 무게로 무너져 내린 동백을 보는 일이란
곤두박질한 주검의 속살을 기웃거리는 일 같아서
두 눈은 동백 너머 푸른 바다 더듬이를 곤두세운다
옛날은 이렇게도 끈질기구나
동백을 보러 갔던 건
거기 내 안의 동백을 부리고자 했던 것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떨어지네
무수한 칼날을 들어 동백의 가지를 치고 또 친들
나를 아예 죽고 죽이지 않은들
저 동백 다시 피어나지 않겠는가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피어나네

 

 

 

―시집『적막』(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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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이명윤

 

 

별들이 다시 지상에 왔다
눈 먼 바람의 시린 손이 마을을 더듬는
아직도 이곳은 위험한 계절이다
서로를 믿었으므로 개의치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눈 속에 묻힌 오래된 말들이 하나 둘 눈을 뜬다
너는 지상에서 꽃이라 불리지만
바람 앞에 맨살로 피어나는 것은
꽃이 아니라 신념인 것
신념은 뒷걸음질치지 않는다
또 다시 두 겹 세 겹 포위해 오는 겨울 앞에
부릅뜬 눈동자로 선 너는
곧 우수수 목소리가 잘려나갈 위험한 사랑이다
봄으로 가는 암호를 스스로 찢어 깨물은
붉은 입술은 네 순결한 사랑의 증표인 것을
감히 누가 사랑을 진압하였다 말하는가
해마다 망각을 찢고 불쑥 불쑥 세상을 겨누는
저 붉은 총구 앞에

 

 


―시집『수화기 속의 여자』(삶이 보이는 창,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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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패설

 

임영조

 

 

법당 앞 돌계단 사이에 두고
어린 동백 두 그루 마주 서 있다
새파란 잎들이 공양 받은 햇살을
키질하듯 살랑살랑 까분다, 금세
분분한 소문 같은 금빛 가루 부시다
그 무슨 법문을 주고받기에
온통 벌개진 낯으로 키들거릴까
얼마나 솔깃하고 귓맛이 나면
노란 목젖이 다 보이도록
꽃술을 활짝 열고 자지러질까
용맹 정진하라, 땡그렁!
아니면 파계하라, 땡그렁!
부연 끝 풍경이 수시로 경을 쳐도
동백꽃은 한사코 입 다물 줄 모른다
참 농후하고 불경스러운 수작을
불당에서 내내 내려다보는
부처님도 손들고 조용하시다
저 철없이 고운 사미들 돌연
옷 벗고 정말 파계하면 어쩌나
절 버리고 혹 내게 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고 가슴 설레는
볼수록 낯뜨겁고 황홀한
동백꽃 패설.

 

 
―계간『시와 사람』(2000년 가을호)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2(제6시집)』(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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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동백


문태준

 


신라의 여승 설요는 꽃 피어 봄마음 이리 설레 환속했다는데
나는 봄날에는 작은 절 풍경에 갇혀 우는 눈먼 물고기이고 싶어라
쩌렁쩌렁 해빙하는 저수지처럼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어도
봄밤에는 숨죽이듯 갇혀 울고 싶더라
먼발치서 한 사람을 공양하는 무정한 불목하니로 살아도
봄날에는 사랑이 살짝 들키기도 해서
절마당에 핀 동백처럼 붉은 뺨이고 싶더라

 

 

 

―시집『맨발』(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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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동백숲길에서
   

고재종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소리소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뱍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

 

 

 

―소월시문학작품집『백련사 동백숲길에서』(문학사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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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이 활짝

 

송찬호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시집『붉은 눈, 동백』(문학과지성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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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雲寺 河口

 

서정주

 

 

禪雲寺 고랑으로
禪雲寺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冬天』, 민중서관, 1968)
―박영근의 시읽기『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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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작과비평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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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동백꽃


임영조

 

 

오늘은 내내 소문만 듣던
해마다 벼르다가 미처 못 가본
선운사 동백꽃 보러 나섰습니다
(소문의 저쪽은 왜 늘 그리움인가?)
고속도로 좌우로 비탈진 산허리엔
한물 간 개나리 진달래 산벚꽃 들이
잠 덜 깬 얼굴로 배웅하지만, 대충
목례나 보내며 직행으로 달렸습니다
(환상은 왜 실제보다 더 화려한가?)
낯선 풍경을 차장으로 으깨며
김제 지나 태인 지나 정읍서 꺾어
한가롭게 내지른 국도로 접어드니
산과들과 마을이 제자리 잡고
무엇이나 움트는 게 보이더군요
시냇가에 밭둑에 논두렁길에
방금 핀 들꽃들의 자잘한 웃음소리
더 생생하고 가깝게 들리더군요
내심 연모해온 그대 만나러 가듯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가는 길
앞만 보고 내처 달리다보니
마음이 먼저 붉게 젖었더군요
복분자술 탓인가, 춘정 탓인가?
정작 선운사 동백꽃은 못 보고
붉게 터져 선혈이 낭자한 상처
노골적인 색정만 보았습니다
입술 색 너무 황홀하고 야하여
온몸이 후끈 달아 넋 놓고.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2 (제4시집 귀로 웃는 집)』(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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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동백꽃


김용택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시집『그여자네 집』(창작과비평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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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동백꽃


유안진

 


무너지고 싶습니다.
녹아지고 싶습니다라고


여우바람으로 자맥질치는 불길


미친 이 불길 잡아 달라고
눈비를 맞아봅니다만


밤마다 고개 드는
죄를 죽입니다만


눈서리가 매울수록
오히려 뜨거워만집니다.


마침내는 왈칵
각혈 쏟고 말았습니다. 부처님.

 

 


―김화영 지음『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시와시학상,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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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모가지들


김지헌 

 

 
모든 이별이 다 서러운 것은 아니다
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꽃도 있지 않더냐


동백꽃이 뚝뚝 무더기로
뛰어 내리는 봄날


타흐리르* 광장
참수(斬首)된 꽃들이
목숨 걸고 대결코자 했던 것


그들이 붉은 피가 식을 때쯤
새로운 태양이
나일을 적실 것이다


모든 이별이 다 부질없는 것은 아니다

 


*타흐리르: 이집트 민주화 운동의 상징.

 

 


ㅡ시집『배롱나무 사원』(시안,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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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피고 지고


홍정순    
     
 
전대 차고 앉아서
손님들 있는 데서
미쳤지유우 우우
막 자라는 풋옥수수 같은 애를
등교 참의 애를
암만 화가 나도 그렇지유우 우우
(연탄집게는 왜 거기 있어가지구우)
그 걸로 애 엉덩이를 치다니
잠시 제 정신이 아니었지유우 우우우
내친 김에
새벽부터 인나 이 고생하는 거 안 보여, 이년아
한방 멕여 보냈으니
뭣에 씌워도 단단히 씌운 게 틀림없지유우 우우우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첫날밤, 도 아니구우)
연탄집게가 탄 중심을 살며시 꼬집어 들어올리듯
시부저기 경고나 해 두는 건데, 우우우
……
전대 찬 마음은 젖은 탄처럼 무거운데 우우우
딸 사랑 받으려고 살짝 빠진 남편
저 화상이야말로 이 연탄집게로 콕!(오늘은 아물케도 제 정신이 아니네유우)
우우우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우우우 어릴 적 그……
(딸?)

 


ㅡ격월간『유심』(2010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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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화인


정재록

 


선창가 뒷골목의 동백여인숙 비닐 장판에
800℃짜리 동백 한 송이 졌던가 보다
보일러의 파이프 자국이 물결치는 노르께한 비닐 바닥에
섬처럼 던져진 까만 점 하나


아까 다방에서 티켓 끊어 차 배달 나가던
핫팬츠의 손목에도 세 개나 찍혀 있던 동백꽃 자국
여인숙의 장판만이 아니라 사람의 살 속으로도
불을 찔러 넣을 수 있다는 증표


불의 도장을 꾹 찔러 넣은 화인火印
불이 심어놓은 뿌리는 깊고 깊다
보온병을 든 손목을 종두자국만하게 파고든 불도
이 막다른 선창까지 뿌리가 한참 깊을 것이다


그 불씨 한 점 가슴에 묻고
이 선창가 후미진 여창에서 너를 생각한다
네 속 깊이 찍혔을 화인을 눈여겨보고 있다
네 몸에 숙명처럼 떠 있을 섬 하나를
이 허름한 여인숙의 비닐장판에서 본다
볼 덴 자국을 증거인멸할 수도 없는 너
그 깊은 뿌리를 더듬어 너에게 가리라.

 

 

 

 

ㅡ『신춘문예 당선 시집』(문학세계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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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동백꽃이더라


한옥순

 

 
이모네 집은 두어 시간 걷고 또 걸어서 가야 있었다

스레트울타리 끼고 칠이 벗겨진 파란색 나무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반들반들한 툇마루가 먼저 보이는 마당 깊은 작은 집,

이모는 말이 별로 없는 대신 소리 없이 크게 웃는

걸걸한 우리 엄마보다는 아주 조금 이뻐 보이는 여자였다

이모가 국수를 삶아 내오는 동안 쪼그리고 앉아서는

휘 둘러볼 것 없이 작고 좁은 방을 한바퀴 돌아본다

이모네 안방 벽엔 포플린인지 옥양목인지 이름만 아는

흰색의 횃대보가 서커스 천막처럼 늘 씌워져 있었다

그 안엔 이모의 단벌 외출복인 공단한복이 걸려져 있었고

이모부의 잿빛 양복과 겨울 외투가 귀한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나는 이모네 벽에 걸렸던 옷들은 오래전에 다 잊었다

다만 쉰다섯 해가 너머 가도록 잊혀지지 않는 건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빨아 꼭꼭 눌러 다려 놓은 횃대보에 핀

꽃, 아주 붉고 작은 슬픈 얼굴의 꽃송이었다

왜 난 궁금하면서도 그 꽃 이름을 묻지 않았었는지

밤새 하얗게 내린 눈밭에 금방 떨어진 듯한 꽃송이들

맨 처음 생리혈을 묻힌 듯 생경스럽고 가슴 뛰는 그 색 색 색

금세라도 숨이 끊어질 듯 한 그 얼굴 얼굴 얼굴들이

동백꽃이란 걸 너무 많이 나이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생전 처음 본 동백은 이모네 방 바람벽에 피었다가

나이 서른아홉에 모가지 툭 내던지듯 목숨 떨군 이모와 함께

연기로 날아간 흰 색 횃대보에 핀 핏빛보다 더 선명하게 붉던 꽃이었다

여덟살 계집애 가슴을 붉게 물들이며 숨이 막히게 하던

그 꽃 이름이 동백이라 하더라

뭔지모를 어린 시절에도 괜스레 눈시울 뜨겁게 하던 꽃들이,

초겨울 석양처럼 늙어서 가 본 서귀포 낯선 길 가 마다에

이모 얼굴을 수도 없이 그려 놓은 것 같은 꽃들이

그게 글쎄 동백이라 하더라

나는 동백꽃을 너무 어릴 적에 보았어라

 

 


―월간『우리시』(201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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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백 신전


   박진성

 

 

   동백은 봄의 중심으로 지면서 빛을 뿜어낸다 목이 잘리고 서도 꼿꼿하게 제 몸 함부로 버리지 않는 사랑이다 파르테 논도 동백꽃이다 낡은 육신으로 낡은 시간 버티면서 이천 오백 년 동안 제 몸 간직하고 있는 꽃이다 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먼 데서부터 소식 전해오겠는가 붉은 혀 같은 동 백꽃잎 바닥에 떨어지면 하나쯤 주워 내 입에 넣고 싶다 내
몸 속 붉은 피에 불지르고 싶다 다 타버리고 나서도 어느 날 내가 유적처럼 남아 이 자리에서 꽃 한 송이 밀어내면 그게 내 사랑이다 피 흘리면서 목숨 꺾여도 봄볕에 달아오르는 내 전 생애다

 

 


―월간『현대시』200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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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아가씨


서안나

 


야야 장사이기 노래 쪼까 틀어봐라이
그이가 목청 하나는 타고난 넘이지라
동백 아가씨 틀어 불면
농협 빚도 니 애비 오입질도 암 것도 아니여
뻘건 동백꽃 후두둑 떨어지듯
참지름 맹키로 용서가 되불지이


백 여시같은 그 가시내도
행님 행님 하믄서 앵겨붙으면
가끔은 이뻐보여야
남정네 맘 한 쪽은 내삘 줄 알게되면
세상 읽을 줄 알게 되는 거시구만
평생 농사지어봐야
남는 건 주름허고 빚이제
비오면 장땡이고
햇빛나믄 감사해부러
곡식 알맹이서 땀 냄새가 나불지
우리사 땅 파먹고 사는 무지랭이들잉께
땅은 절대 사람 버리고 떠나질 않제
암만 서방보다 낫제


장사이기 그 놈 쪼까 틀어보소
사는 거시 벨것이간디
저기 떨어지는 동백 좀 보소
내 가심이 다 붉어져야


시방 애비도 몰라보는 낮술 한 잔 하고 있소
서방도 부처도 다 잊어불라요
야야 장사이기 크게 틀어봐라이
장사이기가 오늘은 내 서방이여!

 

 

 

―계간『시와 문화』(200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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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박미란



 동백은 집중하며 떨어진다

 무엇이든 내리막이 중요하니까


 물의 온도, 바람의 온도, 저 달의 온도


 언젠가 두고 갈 것들이다


 꽃보다 내가 먼저 시들 테지

 뿌리가 얼기 전에, 하루가 절박하기 전에 숨을 불어

넣자


 어디로 가고 있나

 한 쌍의 남녀가 긴 망설임 끝에 헤어졌다


 피부색은 각자 다른데 이별하는 방식은 모두 같아


 온도를 재는 일과 그것을 지키는 일이 부디 꽃 밖에서

도 이루어졌으면




-시집『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문학과 지성사,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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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43일을 쓰다

 

한춘화

 

참말 징하기도 하지

나는 왜 이리

상처가 많은 나라에 태어나

꽃도 피라고 읽고 있는지

모가지째 뚝뚝 져

땅바닥에 핀 동백을

피바람에 베인

목으로 보고 있는지

누가 동백나무에

그날

져버린 아이와 여자와

남자와 노인의 숨

떨어지는 소리를

걸어놨는지

 

살아 꽃이었던 그 어떤 당신들이

해마다 내 가슴에서

참말로 징한 꽃으로 피어

왜 그리 시뻘건지

속살 벌어진 상처 모냥

이리 아픈게

동백 맞는지

꽃 맞는지

 

    

 

계간시산맥(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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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동백 사랑

 

  한이나

 

 

  흰 동백이다 꽃의 흰 사랑이다 그 앞에서는 캄캄한 슬픔도 한결 잦아진다

 

  엎드렸던 마음이다

 

  이 세상 물거품이고 그림자다 흰 색깔의 꽃나무 동백이 다 엎드렸던 마음이다 눈부실 때까지 푸른 열매를 매달지 않는다

 

  나에게는 멀고 먼 반야의 빛이다 아버지다 시다

 

  눈물은 높은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흰소리로 내려온다 잎사귀의 비탈에서 저 혼자 굴러 떨어진다 눈시울 젖은 땅 속으로 스며 한살이 물의 꽃으로 별의 꽃으로 순환한다

 

  흰 동백은 다시 태어나는 내 불면의 사랑이다



 시집『플로리안 카페에서 쓴 편지』(서정시학,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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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모가지들


김지헌 

 

 
모든 이별이 다 서러운 것은 아니다
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꽃도 있지 않더냐


동백꽃이 뚝뚝 무더기로
뛰어 내리는 봄날


타흐리르* 광장
참수(斬首)된 꽃들이
목숨 걸고 대결코자 했던 것


그들이 붉은 피가 식을 때쯤
새로운 태양이
나일을 적실 것이다


모든 이별이 다 부질없는 것은 아니다

 


*타흐리르: 이집트 민주화 운동의 상징.

 

 


ㅡ시집『배롱나무 사원』(시안,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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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모가지들


김지헌 

 

 
모든 이별이 다 서러운 것은 아니다
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꽃도 있지 않더냐


동백꽃이 뚝뚝 무더기로
뛰어 내리는 봄날


타흐리르* 광장
참수(斬首)된 꽃들이
목숨 걸고 대결코자 했던 것


그들이 붉은 피가 식을 때쯤
새로운 태양이
나일을 적실 것이다


모든 이별이 다 부질없는 것은 아니다

 


*타흐리르: 이집트 민주화 운동의 상징.

 

 


ㅡ시집『배롱나무 사원』(시안,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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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섬


김혜영  
 
  
당신의 숨소리 날 삼켜보실래요?

알몸으로 태양을 받아들이는 섬
시퍼런 몸 속 바다로 수장될지도 몰라

점점 섬이 되어가는 여자

파도, 동백꽃 입술을 핥는다

 

 


ㅡ시집『프로이트를 읽는 오전』(도서출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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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미황사에서


박남준

 


동백의 숲까지 나는 간다
저 붉은 것
피를 토하며 매달리는 간절한 고통 같은 것
어떤 격렬한 열망이 이 겨울 꽃을 피우게 하는지
내 욕망의 그늘에도 동백이 숨어 피고 지고 있겠지


지는 것들이 길위에 누워 꽃길을 만드는 구나
동백의 숲에서는 다만 꽃의 무상함도 일별 해야 했으나
견딜 수 없는 몸의 무게로 무너져 내린 동백을 보는 일이란
곤두박질한 주검의 속살을 기웃거리는 일 같아서
두 눈은 동백너머 푸른 바다 더듬이를 곤두세운다
옛날은 이렇게도 끈질기구나
동백을 보러갔던 건
거기 내안의 동백을 부리고자 했던 것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떨어지네
무수한 칼날을 들어 동백의 가지를 치고 또 친들
나를 아예 죽고 죽이지 않은들
저 동백 다시 피어나지 않겠는가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피어나네

 

 


-시집『적막』(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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