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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시 모음- 문정희/김명인/감태준/최하림/서정윤/민영/이시영/김종해/김희정최형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4. 2.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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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랑

아들에게

 

문정희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룰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때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시집 『어린 사랑에게』(미래사, 1991)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9』(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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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김명인 

 

 

풍랑에 부풀린 바다로부터
항구가 비좁은 듯 배들이 든다
또 폭풍주의보가 내린 게지, 이런 날은
낡은 배들 포구 안에서 숨죽이고 젊은 선단들만
황천(荒天) 무릅쓰고 조업 중이다
청맹이 아니라면
파도에게 저당 잡히는 두려운 바다임을 아는 까닭에
너의 배 지금 어느 풍파 갈기에 걸쳤을까
한 번의 좌초 영원한 난파라 해도
힘껏 그물을 던져 온몸으로 사로잡아야 하는 세월이니
네 파도는 또박또박 네가 타 넘는 것
나는 평평탄탄(平平坦坦)만을 네게 권하지 못한다
섬은 여기 있어라 저기 있어라
모든 외로움도 결국 네가 견디는 것
몸이 있어 바람과 맞서고 항구의 선술로
입안 달게 헹구리니
아들아, 울안에 들어 바람 비끼는 너였다가
마침내 너 아닌 것으로 돌아서서
네 뒤 아득한 배후로 멀어질 것이니
더 많은 멀미와 수고를 바쳐
너는 너이기 위해 네 몫의 풍파와 마주 설 것!

 

 


―시집『꽃차례』(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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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감태준

 

 

떠날 때가 왔다.

이 집에서 가장 먼 곳에

너의 집을 지어라.

 

새는 둥지를 떠날 때 빛나고

사람은 먼 길을 떠날 때 빛난다.

외투를 입어라.

바람이 차다.

 

길 곳곳이 얼음판이다.

겁 없이 미끄러지고

외투에 흙 남기지 마라.

외투란 먼지만 묻어도 누더기다.

 
앞이 어둡고 한기 들 땐

사람의 집을 찾아라.

마음이 불어가는 쪽에 있다.

 
마음이 불어가지 않으면

마음에 들어가 쉬어라.

 
길은 시련 속에 있다.

이제 도도히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 가

너의 집을 지어라.

 

 


ㅡ시집『역에서 역으로』(문학수첩,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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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최하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들을 본다
아무 생각 없이, 고통스럽게
지나가버린 시간들
다시 잡으려 해도 소용없는
시간 속으로
나는 되돌아갈 수 없으며
잃어버린 시간들을 다시 찾을 수도 없다
변해버린 사람과 깨어진 사랑
속에서 나는 걸음을 옮겨야 한다
남루한 저고리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
물푸레나무 우거진 길로, 물 속으로,
이슬비 내리는 둑에서 나는 보아야 한다
세상이란 좋은 것이다
서로 잘 어깨동무하고
서로 잘 조화를 이루며 산다
비 내리는 둑에서
나뭇잎들은 푸르고
산색은 살아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슬픔 기쁨
으로 밤을 걸어가고 가끔 불켜진
창을 올려다보며 그리워하기도 한다
날이 깊어간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기억이 희미해지고 모든
사랑이 딱딱한 사물로 변해간다
내 손에서 따스했던 네 손이 사라진다
이제 나는 잃어버리게 될 시간들
을 생각하고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물푸레나무가
우거져 있다 시간들이 우거져 있다

 

 

 

ㅡ시집『속이보이는 심연으로』(문학과지성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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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뒤에서
―아들에게


서정윤

 


전생의 사랑을 지우려
오래 잠자고
또 다른 미움을 잊으려
울부짖는다.


그래도 나와는 인연이 있어
내 품에 안겨서는
뜻모를 웃음을 웃는다.


이제 시작된
사랑의 삶을 위해
나는 너의 뒤에 섰다.


고통과 아픔의 삶보다는
기쁨과 희망의 날이
더 많은 삶, 살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용기와 믿음 뿐


나는 너의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나에게 남은 마지막 사랑을
너의 삶에 보낸다.

 

 

 

―시집『홀로서기 3』(문학수첩,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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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아들에게

 

민영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늘 약골이라 놀림받았다.

큰 아이한테는 떼밀려 쓰러지고

힘센 아이한테는 얻어맞았다.

 

어떤 아이는 나에게

아버지 담배 가져오라 시키고,

어떤 아이는 나에게

엄마 돈을 훔쳐오라고 시켰다.

 

그럴 때마다 약골인 나는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갖다 주었다.

떼밀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얻어맞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생각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떼밀리고 얻어맞으며 지내야 하나?

그래서 나는 약골들을 모았다.

 

모두 가랑잎 같은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비굴할 수 없다.

얻어맞고 떼밀리며 살 수는 없다.

어깨를 겨누고 힘을 모으자.

 

처음에 친구들은 주춤거렸다.

비실대며 꽁무니빼는 아이도 있었다.

일곱이 가고 셋이 남았다.

모두 가랑잎 같은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약골이다.

떼밀리고 얻어맞는 약골들이다.

그러나,약골도 뭉치면 힘이 커진다.

가랑잎도 모이면 산이 된다.

 

한 마리의 개미는 짓밟히지만,

열 마리가 모이면 지렁이도 움직이고

십만 마리가 덤벼들면 쥐도 잡는다.

백만 마리가 달려들면 어떻게 될까?

 

코끼리도 그 앞에서는 뼈만 남는다.

떼밀리면 다시 일어나자!

맞더라도 울지 말자!

약골의 송곳 같은 가시를 보여주자!

 

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

우리나라도 약골이라 불렸다.

왜놈들은 우리 겨레를 채찍질하고

나라 없는 노예라고 업신여겼다.

 

 

 

시집엉겅퀴꽃(창비,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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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들에게 주는 시

 

랭스턴 휴즈

 

 

아들아, 난 너에게 말할 게 있다.
내 인생은 수정으로 된 계단이 아니었어.
계단에는 못도 떨어져 있었고
가시도 있었다.
그리고 판자에는 구멍이 있었지.
바닥엔 양탄자도 깔려 있지 않았다.
맨바닥이었어.
그러나 난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계단을 올라왔다.
층계참에 도달하고
모퉁이도 돌고
때론 전깃불도 없는 캄캄한 곳까지 올라갔지.
그러니 아들아, 너도 돌아서지 마라.
주저앉지 말아라
왜냐하면 넌 지금
조금 힘든 것일 뿐이니.
너도 곧 그걸 알게 될 거야.
지금 주저앉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애야, 너는 아직
그 계단을 올라가고 있단다.
나는 아직도 오르고 있어.
그리고 인생은 내게
수정으로 된 계단이 아니었지

 

 


―신현림 엮음『딸아,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걷는나무,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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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

 

  이시영

 

   

  바다가 가까워지자 어린 강물은 엄마 손을 더욱 꼭 그러쥔 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거대한 파도의 뱃속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다 엄마 손을 아득히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 잘 가거라 내 아들아. 이제부터는 크고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단다. 엄마 강물은 새벽 강에 시린 몸을 한번 뒤채고는 오리처럼 곧 순한 머리를 돌려 반짝이는 은어들의 길을 따라 산골로 조용히 돌아왔습니다.

   

 

 

시집은빛호각(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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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아들


  김종해

 

 
  사춘기가 끝나가자 아들은 가출을 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반장이었던 아들, 집과 학교가 없는 낙원을 찾아 아들은 문득 가출을 했다. 체제와 사회에 각을 세우고 갓자란 뿔을 들이댔던 어린 양 한 마리. 뿔은 가렵다. 목가적인 집안의 목책은 뚫렸고, 담임 선생님은 학내 감염을 우려해서 교실 곳곳마다 구제역 백신을 뿌렸다. 몇날 며칠 동안 텅 빈 구윳간을 보며 아버지는 잠을 설쳤고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했다.
  가출한 아들을 찾아서 아버지는 노숙자의 역驛과 어린 짐승이 뛰어놀만한 야생의 산과 초원을 뒤졌다. 아들의 절친 인맥을 하나하나 찿아 헤매던 아버지, 드디어 단서를 찾았다. 아들에겐 음악이 있었다. 아들은 초식草食이나 육식肉食보다 향긋한 음악에 더 정신을 쏟고 있었던 것을.
  기적소리조차 검은 서울역 근처 남영동의 한 음악다방 DJ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 아들은 음악다방 문을 밀치고 나와 바람보다 빠르게 달아났다. 그 뒤를 아버지가 쫓아갔다. 기적소리조차 검은 서울역 뒤 골목에서 골목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바람보다 빠르게 달렸다. 목책 바깥을 나와 길을 잃고 달려가는 어린 양 뒤로 아버지 양이 달려간다.
  석탄재 날리는 막힌 골목에서 마지막 질주는 끝나고,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짚고 헉헉헉헉. 아들은 머리를 숙이고 헉헉헉헉. 아버지와 아들사이엔 세상의 어떤 인간의 말도 오가지 않았다.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헉헉헉헉.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오랫동안 헉헉헉헉. 

 

 


ㅡ계간『애지』(2012. 여름)
ㅡ시집『눈송이는 나의 각角을 지운다』(문학세계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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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김희정(1967∼ )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너희들이 태어나고, 제일 먼저
그림자를 버렸단다
사람들은 아빠보고 유령이라 말하지만
너희들이 아빠라고 불러줄 때마다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단다


다음으로 버린 것은 남자라는 단어야
폼 잡았던 남자라는 옷 벗어 던지고
너희들이 달아 준 이름
아빠를 달고 세상을 향해 걷고 또 걷는단다
그 순간만은 아빠라는 이름이 훈장이 되고
슈퍼맨의 망토가 된단다


다음은 지갑을 닫았단다
멋진 폼으로 친구들 앞에서
지갑을 열었던 날이 있었지
네가 태어났던 날이야
그날을 끝으로
먼저 지갑을 꺼내 본 적이 없단다


망설이다 망설이다, 버린 것이 자존심이야
너무나 버리기가 힘들어
마음 한 구석에 숨겨놓았지
네가 학교에 입학하고
책가방이 무거워져 갈 때
오랜 세월 자리를 잡아
나오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그 자존심
잘 마시지 못한 소주 꾸역꾸역 삼키며
세상 밖으로 토해냈단다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사람들이 그림자가 없다고 놀려도
남자의 옷을 벗고 다닌다고 말해도
지갑이 없다고 수군거려도
배알이 없다는 말로
심장에 비수를 꽂아도
나는 너희들의 아빠니까, 괜찮아
아빠니까 말이야
 

 

 

―시집『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화남, 2012)




우리 아들 최 감독

 

최형태(1952)

 

 

전공인 영화를 접은 둘째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바리스타에 입문하였다

졸업 작품으로 단편영화를 찍고

개막작으로 뽑히고 하길래

영화감독 아들 하나 두나 보다 했는데

영화판에는 나서볼 엄두도 못 내고

여기저기 이력서 내고 면접도 보러 다니고 하더니

끝내 방향을 틀어버렸다

그러던 녀석이 어느 날 손에 들고 들어오던

권정생 선생 책이라니……

아비 닮아 저런 책이나 좋아한다

이 험난한 청년 수난 시대에 어찌 먹고살려고……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식구들은 그를

감독이라 부른다 최 감독

안 되면 자신의 삶이라도 연출할 테니까

알고 보면 누구나 감독이다

 

 

 

시집어느 무명 파두 가수의 노래(책만드는집,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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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떠돌건 집에는 일찍 돌아오거라

 

장인수

 

 

아들아

어디를 떠돌건 집에는 일찍 돌아오거라

설령 한두 해에 돌아오기 힘들지라도

아들아

어디를 떠돌건 집에는 일찍 돌아오거라

일몰의 긴 그림자를 발갛게 지펴

고등어를 굽는 에미가 기다리고 있으마

대적광전이

너무 쓸쓸해서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비로자나불처럼

숨어 우는 바람 소리를

가는귀로 들으며

새벽 찬 길을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마

무소 같은 아들아

어디를 떠돌건 집에는 일찍 돌아오거라

 

 

 

웹진공정한 시인의 사회(2017,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