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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랜 강 / 공광규 - 놀란흙 / 마경덕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5. 2.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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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랜 강
 

공광규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모래밭은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수만 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질린 강

 

 


-시인 203인의 특별 공동시집『그냥 놔두라』(도서출판 화남,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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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흙

 

마경덕

 

 

뒤집힐 때 흙도 놀란다

쟁기 삽 괭이 호미 쇠스랑 포클레인… 누가 제일 먼저 괭잇날에 묻은 비명을 보았을까

낯빛이 창백한, 눈이 휘둥그런

 

겨냥한 곳은 흙의 정수리거나 잠든 미간이거나,

 

흙의 표정을 발견한 누군가의 첫 생각, 그때 국어사전에 놀란흙이라는 명사가 버젓이 올라갔다

 

흙의 살붙이, 지렁이 땅강아지 개미 두더지

그것들이 가랑이를 헤집어 집을 짓고 길을 내도 놀라지 않는다

나무뿌리, 바위뿌리에도 덤덤한 흙이

사람만 보면 왜 그리 놀라는지,

 

흙의 나라

태초에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을 닮은 흙의 심장은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공사장 주변, 포클레인이 파헤친 땅

매장된 산업폐기물을 껴안고 까맣게 죽어있었다

싱싱하던 흙빛은 흑빛이었다

 

소심하고 겁 많은 아버지는 흙집으로 들어가

더는 놀라지 않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래서 자주 놀란다

 

 


―계간『불교문예』(2014년 가을호)